강원 삼척시 정상동 82-1
이 비들은 조선< 朝鮮 > 현종< 顯宗 > 2년(1661) 삼척부사< 三陟府使 > 허목< 許穆 >이 세운 것이다.허목(1595∼1682) 선생은 퇴계< 退溪 > 이황< 李滉 > 선생의 성리학< 性理學 >을 물려받아 근기< 近畿 >의 실학발전< 實學發展 >에 가교적< 架橋的 > 역할을 한 분으로 효종< 孝宗 >의 초상< 初喪 >에 대한 모후< 母后 >의 복상기간< 服喪期間 >이 논의< 論議 >되자 서인< 西人 > 송시열< 宋時烈 > 등의 기년설< 朞年說 >을 반대하여 남인< 南人 > 선두< 先頭 >에서 삼년설< 三年說 >을 주장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 左遷 >되었다.당시 삼척은 해파< 海波 >가 심하여 조수< 潮水 >가 읍내< 邑內 >까지 올라오고 홍수 때는 오십천< 五十川 >이 범람하여 주민의 피해< 被害 >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은 신비한 뜻이 담긴 동해송< 東海頌 >을 지어 독창적인 고전자체< 古篆字體 >로 써서 정라진< 汀羅津 > 앞의 만리도< 萬里島 >에 동해비< 東海碑 >를 세우니 바다가 조용해졌다. 그후 비가 파손< 破損 >되어 조수가 다시 일자 숙종< 肅宗 > 36년(1710) 이를 모사< 模寫 >하여 현재의 정상리< 汀上里 > 육향산< 六香山 >에 세워 조수를 막았다 한다. 문장이 신비하고 물리치는 능력을 가졌다 하여 퇴조비< 退潮碑 >라고도 하는 이 비는 전서체< 篆書體 >에서 동방 제일의 필치< 筆致 >라 일컬어지는 허목의 기묘한 서체로서도 유명하다.동해비와 조금 떨어져 있는 평수토찬비< 平水土贊碑 >는 동해비와 같이 세운 것으로 비문< 碑文 >은 중국< 中國 > 형산< 衡山 >의 우제< 禹帝 >가 썼다는 전자비< 篆字碑 >에서 48자를 선택하여 목판< 木版 >에 새기어 군청< 郡廳 >에 보관하던 것을 고종< 高宗 > 광무< 光武 > 8년(1904)에 칙사< 勅使 > 강홍대< 康洪大 >와 삼척군수< 三陟郡守 > 정운석< 鄭雲晳 > 등이 석각< 石刻 >하여 세운 것이다.
이 비들은 조선< 朝鮮 > 현종< 顯宗 > 2년(1661) 삼척부사< 三陟府使 > 허목< 許穆 >이 세운 것이다.허목(1595∼1682) 선생은 퇴계< 退溪 > 이황< 李滉 > 선생의 성리학< 性理學 >을 물려받아 근기< 近畿 >의 실학발전< 實學發展 >에 가교적< 架橋的 > 역할을 한 분으로 효종< 孝宗 >의 초상< 初喪 >에 대한 모후< 母后 >의 복상기간< 服喪期間 >이 논의< 論議 >되자 서인< 西人 > 송시열< 宋時烈 > 등의 기년설< 朞年說 >을 반대하여 남인< 南人 > 선두< 先頭 >에서 삼년설< 三年說 >을 주장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 左遷 >되었다.당시 삼척은 해파< 海波 >가 심하여 조수< 潮水 >가 읍내< 邑內 >까지 올라오고 홍수 때는 오십천< 五十川 >이 범람하여 주민의 피해< 被害 >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은 신비한 뜻이 담긴 동해송< 東海頌 >을 지어 독창적인 고전자체< 古篆字體 >로 써서 정라진< 汀羅津 > 앞의 만리도< 萬里島 >에 동해비< 東海碑 >를 세우니 바다가 조용해졌다. 그후 비가 파손< 破損 >되어 조수가 다시 일자 숙종< 肅宗 > 36년(1710) 이를 모사< 模寫 >하여 현재의 정상리< 汀上里 > 육향산< 六香山 >에 세워 조수를 막았다 한다. 문장이 신비하고 물리치는 능력을 가졌다 하여 퇴조비< 退潮碑 >라고도 하는 이 비는 전서체< 篆書體 >에서 동방 제일의 필치< 筆致 >라 일컬어지는 허목의 기묘한 서체로서도 유명하다.동해비와 조금 떨어져 있는 평수토찬비< 平水土贊碑 >는 동해비와 같이 세운 것으로 비문< 碑文 >은 중국< 中國 > 형산< 衡山 >의 우제< 禹帝 >가 썼다는 전자비< 篆字碑 >에서 48자를 선택하여 목판< 木版 >에 새기어 군청< 郡廳 >에 보관하던 것을 고종< 高宗 > 광무< 光武 > 8년(1904)에 칙사< 勅使 > 강홍대< 康洪大 >와 삼척군수< 三陟郡守 > 정운석< 鄭雲晳 > 등이 석각< 石刻 >하여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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