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 산3-1
조선< 朝鮮 > 효종대< 孝宗代 >의 영의정< 領義政 >을 지냈던 백강< 白江 > 이경여< 李敬輿 > 선생이 부여< 扶餘 >에 낙향< 落鄕 >한 후 효종< 孝宗 > 8년(1657) 북벌에 관련된 상소를 올리자 왕< 王 >의 비답< 批答 >이 있었다. 그중에 "성이지통재심< 誠以至痛在心 > 유일모도원의< 有日暮途遠意 >"라는 구절이 후에 우암< 尤庵 > 송시열< 宋時烈 >이 '지통재심 일모도원'의 8자를 써서 아들 민서< 敏敍 >에게 전했는데 후에 손자 이명< 이命 >이 숙종< 肅宗 > 26년(1700)에 바위에 새기고 건물을 세워 대재각< 大哉閣 >이라 하였다. 이는 백강이 효종의 비답을 받았으므로 상서의 "대재왕언< 大哉王言 >"이라는 구절에서 딴 것이다. 백강< 白江 >(1585∼1657)은 광해군< 光海君 > 원년(1609)에 문과< 文科 >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다가 인조< 仁祖 > 때 부교리< 副敎理 >에 나아갔다. 병자호란< 丙子胡亂 > 때에는 도성사수< 都城死守 >를 주장한 5척신< 五斥臣 >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이규< 李계 >의 사건에 관련되어 심양< 瀋陽 >에 유배< 流配 >되었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영의정< 領義政 >이 되어 북벌계획< 北伐計劃 >을 세우고 양병< 養兵 >에 힘썼으나 청< 淸 >의 간섭< 干涉 >으로 물러나 부여에 낙향하였다. 상소문< 上疏文 >도 시무< 時務 >와 북벌 양병에 관한 것이었으며, 효종< 孝宗 >은 비답< 批答 >을 통하여 호란< 胡亂 >의 치욕< 恥辱 >을 씻지 못하는 비통함을 표현하였다.
조선< 朝鮮 > 효종대< 孝宗代 >의 영의정< 領義政 >을 지냈던 백강< 白江 > 이경여< 李敬輿 > 선생이 부여< 扶餘 >에 낙향< 落鄕 >한 후 효종< 孝宗 > 8년(1657) 북벌에 관련된 상소를 올리자 왕< 王 >의 비답< 批答 >이 있었다. 그중에 "성이지통재심< 誠以至痛在心 > 유일모도원의< 有日暮途遠意 >"라는 구절이 후에 우암< 尤庵 > 송시열< 宋時烈 >이 '지통재심 일모도원'의 8자를 써서 아들 민서< 敏敍 >에게 전했는데 후에 손자 이명< 이命 >이 숙종< 肅宗 > 26년(1700)에 바위에 새기고 건물을 세워 대재각< 大哉閣 >이라 하였다. 이는 백강이 효종의 비답을 받았으므로 상서의 "대재왕언< 大哉王言 >"이라는 구절에서 딴 것이다. 백강< 白江 >(1585∼1657)은 광해군< 光海君 > 원년(1609)에 문과< 文科 >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다가 인조< 仁祖 > 때 부교리< 副敎理 >에 나아갔다. 병자호란< 丙子胡亂 > 때에는 도성사수< 都城死守 >를 주장한 5척신< 五斥臣 >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이규< 李계 >의 사건에 관련되어 심양< 瀋陽 >에 유배< 流配 >되었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영의정< 領義政 >이 되어 북벌계획< 北伐計劃 >을 세우고 양병< 養兵 >에 힘썼으나 청< 淸 >의 간섭< 干涉 >으로 물러나 부여에 낙향하였다. 상소문< 上疏文 >도 시무< 時務 >와 북벌 양병에 관한 것이었으며, 효종< 孝宗 >은 비답< 批答 >을 통하여 호란< 胡亂 >의 치욕< 恥辱 >을 씻지 못하는 비통함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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