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 19
부여읍 군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 사지<寺址>로 사찰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1935년과 1936년에 걸쳐 백제 사찰로서는 최초로 일인<日人> 이시다(석전무작<石田茂作>)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불상<佛像>과 연화문·인동문이 아름답게 양각된 상자형전<箱子形塼>, 금제고리, 작은 구슬 등 많은 유물을 수습할 수 있었다.
부여읍 군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 사지<寺址>로 사찰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1935년과 1936년에 걸쳐 백제 사찰로서는 최초로 일인<日人> 이시다(석전무작<石田茂作>)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불상<佛像>과 연화문·인동문이 아름답게 양각된 상자형전<箱子形塼>, 금제고리, 작은 구슬 등 많은 유물을 수습할 수 있었다.
먼저, 발굴 결과 확인된 가람의 배치는 중문<中門>·목탑<木塔>·금당<金堂>·강당<講堂> 등이 남북선상에 일직선으로 배치된 1탑 1금당식의 가람구조였는데, 이는 백제 사찰의 가람구조로는 최초로 확인된 것으로, 학계의 크나큰 주목을 끌었다. 실제로 이후 계속된 백제 사찰의 발굴 결과 모든 백제 사찰은 이와 같은 1칸 1금당식의 가람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어 이제는 백제 사찰의 가람구조에 대한 기본 상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제일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강당지는 남북 약 20m·동서 약 30m의 크기를 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남쪽으로 18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금당지는 남북 약 20m·동서 약 27m의 크기에 정면 9칸의 구조를 하고 있다. 이 금당지는 2차 조사 때 확인된 것인데, 기단이 와적기단<瓦積基壇>으로 되어 있어 주목을 끌었다.
목탑지는 금당지에서 남쪽으로 약 10m의 거리를 두고 있는데, 발굴조사시 표토하 1.8m 깊이에서 일변 약 93㎝의 방형주좌<方形柱座>가 있는 큰 초석을 발견하여 이것이 탑의 심초석으로 판명됨에 따라 목탑지<木塔址>임을 알 수 있었다. 유물은 강당지<講堂止>와 금당지<金堂址>, 목탑지<木塔址> 등지에서 골고루 출토되었다. 먼저, 강당지 남쪽에서는 금동관 배편이 발견 되었으며, 금당지 주위와 탑지에서는 모두 1,150여 점에 달하는 옥류<玉類>가 출토되었다. 또, 금동제 방울과 구두 모양의 금구<金具>는 금당 서쪽에서 출토되었으며, 탑의 심초석<心礎石> 옆에서는 토제관 배편과 금제고리 등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 목탑지의 중심부에서는 지표하 1.2∼1.5m 사이에서 보물 제330호의 군수리 금동미륵보살입상<軍守里 金銅彌勒菩薩立像>과 보물 제329호의 군수리 석조여래좌상<軍守里 石彫如來坐像>등 2점의 불상과 토기, 철기 등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목탑지 중심부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1척<尺> 7촌<寸>의 칠지도<七支刀>이다. 이 칠지도는 철못, 삼족토기<三足土器>, 접시형 토기, 사발형 토기 등과 함께 출토되었는데, 현재 그 소재지는 알 수 없지만 이와 비슷한 백제 칠지도<七支刀> 하나가 일본 덴리시(천리시<天理市>)에 보존되어 있어 양국의 문화교류의 일단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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