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33외 7필
부여< 扶餘 >는 백제의 옛 도읍지로서, 부여박물관< 扶餘博物館 >을 포함한 주변의 관북리< 官北里 > 일대는 당시의 왕궁지로 추정되고 있다. 관북리의 여러 민가< 民家 >에는 백제의 건축용 석재< 石材 >와 주춧돌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박물관 경내에 있는 조선시대< 朝鮮時代 > 관아< 官衙 > 건물들에는 백제의 주춧돌과 석재를 가져와 사용하였다. 박물관 정원에 안치된 부여석조도 원래 이 근처에 있었고, 부여여자고등학교< 扶餘女子高等學校 > 교정의 우물은 하변< 下邊 >이 팔각< 八角 >으로 임금이 마셨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곳은 부소산성< 扶蘇山城 >의 남쪽 기슭으로 부여 시가지< 市街地 >가 내려다보이는 좋은 입지< 立地 >조건을 갖추고 있어 백제왕궁지로서 가장 유력시되고 있는 곳이다. 1982년에서 1983년에 걸친 이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박물관 앞 공터에서 백제의 연못을 발견하였다. 연못은 정교한 호안석< 護岸石 >을 갖추었고, 그 내부에서는 연화문와당< 蓮華紋瓦當 >, 인명와편< 印銘瓦片 >, 철제창< 鐵製槍 >, 화살촉, 개원통보< 開元通寶 >, 토기, 은제귀걸이, 대바구니 등 다양한 유물이 대량 수습< 收拾 >되었다. 특히 백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나무패에 글씨를 쓴 목간< 木簡 >이 출토되었다. 조사 당시 건물지< 建物址 > 기단성토층< 基壇盛土層 >이 일부 확인되었으며, 그 성토층 아래에서는 청동기시대< 靑銅器時代 > 무문토기< 無文土器 >가 여러 점 나와 이곳은 선사< 先史 > 이래 인적이 이어져온 곳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부여< 扶餘 >는 백제의 옛 도읍지로서, 부여박물관< 扶餘博物館 >을 포함한 주변의 관북리< 官北里 > 일대는 당시의 왕궁지로 추정되고 있다. 관북리의 여러 민가< 民家 >에는 백제의 건축용 석재< 石材 >와 주춧돌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박물관 경내에 있는 조선시대< 朝鮮時代 > 관아< 官衙 > 건물들에는 백제의 주춧돌과 석재를 가져와 사용하였다. 박물관 정원에 안치된 부여석조도 원래 이 근처에 있었고, 부여여자고등학교< 扶餘女子高等學校 > 교정의 우물은 하변< 下邊 >이 팔각< 八角 >으로 임금이 마셨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곳은 부소산성< 扶蘇山城 >의 남쪽 기슭으로 부여 시가지< 市街地 >가 내려다보이는 좋은 입지< 立地 >조건을 갖추고 있어 백제왕궁지로서 가장 유력시되고 있는 곳이다. 1982년에서 1983년에 걸친 이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박물관 앞 공터에서 백제의 연못을 발견하였다. 연못은 정교한 호안석< 護岸石 >을 갖추었고, 그 내부에서는 연화문와당< 蓮華紋瓦當 >, 인명와편< 印銘瓦片 >, 철제창< 鐵製槍 >, 화살촉, 개원통보< 開元通寶 >, 토기, 은제귀걸이, 대바구니 등 다양한 유물이 대량 수습< 收拾 >되었다. 특히 백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나무패에 글씨를 쓴 목간< 木簡 >이 출토되었다. 조사 당시 건물지< 建物址 > 기단성토층< 基壇盛土層 >이 일부 확인되었으며, 그 성토층 아래에서는 청동기시대< 靑銅器時代 > 무문토기< 無文土器 >가 여러 점 나와 이곳은 선사< 先史 > 이래 인적이 이어져온 곳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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