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137
풍계서원은 대강면 풍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영의정 황희<黃喜>를 주벽으로 삼고, 오상덕, 황위 등의 3현을 배향하고 있다. 황희는 그 선조가 대대로 남원과 장수에 살았으며, 아버지 황군서가 개경(지금의 개성)으로 옮겨 황희는 공민왕 12년(1363년)에 개경 가조리에서 출생하였다. 고려말 두문동에 들어간 황희는 72현의 대표로 조선 조정에 파견되어 처음에 사헌부 감찰로부터 새 출발을 하였고, 뒤이어 지신사가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세자 책봉 문제로 태종과 이견으로 3년간 남원으로 유배되었다. 황희의 유배생활 3년동안 그는 남원에 내려와 6대조 황감평이 지은 일재의 옛터에 조그마한 루를 세워 광통루라 이름하고, 이곳에 묻혀 독서에 골몰하였다. 오상덕은 아호를 두암이라 하였으며, 고려말기의 대학자인 이색, 정몽주, 이숭인등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불교를 누르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왕에게 여러차례 상소하였다. 그는 방촌 황희의 자형이 되며, 벼슬이 소부시 소감을 지냈으나, 조선 개국 후에는 관직을 버리고 고려의 유신들과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으며, 세상의 영욕과 인연을 끊는다는 뜻에서 스스로 두암이라 자호하였다. 오늘날 두문동 72현의 한 분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황위는 아호를 당촌이라 하며, 임진왜란때 진주성에서 순국한 무민공 황진 장군의 후예이다. 일찍이 사마과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고 효종때 한성부 서윤을 지낸 바 있다. 시문에 능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노후에는 후학 교육에 여생을 바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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