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태안군 남면 양잠리 338
태안군<泰安郡> 남면<南面> 양잠리 338번지에 위치한 소주가씨<蘇州賈氏>의 사당<祠堂>으로 조선조<朝鮮朝> 철종 2년(1851)에 왕명<王命>에 따라 가유약<賈維약>, 가상<假想>, 가침<賈琛>의 삼세<三世>를 기리는 이른바 이충일효<二忠一孝>의 불천지위<不遷之位> 사우<祠宇>와 정문<旌門>을 하사<下賜>받아 지어진 건물<建物>이다. 소주가씨<蘇州賈氏>의 중시조<中始組>인 가유약<賈維약>은 중국<中國>의 명성<名聲>높은 장군<將軍>으로 선조 26년(1592)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내조<來朝>하여 왜군<倭軍>을 무찌르는데 큰공을 세우고 선조 29년(1595)녕에 귀국<歸國>하였다. 그러나 선조 31년(1597)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가유약<賈維 >장군은 아들 가상<賈祥>장군과 손자인 가침<賈琛>을 데리고 다시 내조<來朝>하여 다음해인 1598년에 가유약<賈維약>과 가상<賈祥>은 마귀제독<麻貴提督>과 함께 남원<南原>에서 왜적<倭敵>을 무찌르고 다시 부산<釜山> 전투에 임하여 용전분투<勇戰奮鬪>하다 불행히도 부자<父子>가 함께 전사<戰士>하니 이곳이 부산 도독포(지금의 자성대<子城墓>)였다. 가유약<賈維약>의 손자인 가침<賈琛>은 영내<營內>에 머무르고 있다. 이같은 비보<悲報>를 접수하고는, 대성통곡<大聲痛哭>하며 즉시 전지<戰地>로 달려나가 원수를 갚으려 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한채 조부<祖父>와 부친<父親>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葬事>하고 시묘<侍墓> 하였다. 시묘<侍墓>를 마친 가침<賈琛>은 일생동안 조선국에 살면서 왜국쪽을 향해 한번도 앉은적이 없다고 전한다. 그후 가침<賈琛>의 아들인 성<晟> 호<昊> 병<昺> 수<遂>등 4형제가 조국<祖國>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륙<大陸>과 가까운 태안<泰安>으로 왔으나 선편<船便>이 여의치못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태안<泰安>에 정주<定住>하게 되었다. 이렇게 정주<定住>하면서 자손<子孫>이 번창하고 따라서 가세<家世>가 확장되어가니 후손<後孫>들이 선대<先代>의 유공<有功>함을 조정<朝廷>에 건의하여 마침내 그 뜻을 이루어지니 이것이 숭의사<崇議祠>를 짓게 된 동기가 되었다.
태안군<泰安郡> 남면<南面> 양잠리 338번지에 위치한 소주가씨<蘇州賈氏>의 사당<祠堂>으로 조선조<朝鮮朝> 철종 2년(1851)에 왕명<王命>에 따라 가유약<賈維약>, 가상<假想>, 가침<賈琛>의 삼세<三世>를 기리는 이른바 이충일효<二忠一孝>의 불천지위<不遷之位> 사우<祠宇>와 정문<旌門>을 하사<下賜>받아 지어진 건물<建物>이다. 소주가씨<蘇州賈氏>의 중시조<中始組>인 가유약<賈維약>은 중국<中國>의 명성<名聲>높은 장군<將軍>으로 선조 26년(1592)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내조<來朝>하여 왜군<倭軍>을 무찌르는데 큰공을 세우고 선조 29년(1595)녕에 귀국<歸國>하였다. 그러나 선조 31년(1597)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가유약<賈維 >장군은 아들 가상<賈祥>장군과 손자인 가침<賈琛>을 데리고 다시 내조<來朝>하여 다음해인 1598년에 가유약<賈維약>과 가상<賈祥>은 마귀제독<麻貴提督>과 함께 남원<南原>에서 왜적<倭敵>을 무찌르고 다시 부산<釜山> 전투에 임하여 용전분투<勇戰奮鬪>하다 불행히도 부자<父子>가 함께 전사<戰士>하니 이곳이 부산 도독포(지금의 자성대<子城墓>)였다. 가유약<賈維약>의 손자인 가침<賈琛>은 영내<營內>에 머무르고 있다. 이같은 비보<悲報>를 접수하고는, 대성통곡<大聲痛哭>하며 즉시 전지<戰地>로 달려나가 원수를 갚으려 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한채 조부<祖父>와 부친<父親>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葬事>하고 시묘<侍墓> 하였다. 시묘<侍墓>를 마친 가침<賈琛>은 일생동안 조선국에 살면서 왜국쪽을 향해 한번도 앉은적이 없다고 전한다. 그후 가침<賈琛>의 아들인 성<晟> 호<昊> 병<昺> 수<遂>등 4형제가 조국<祖國>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륙<大陸>과 가까운 태안<泰安>으로 왔으나 선편<船便>이 여의치못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태안<泰安>에 정주<定住>하게 되었다. 이렇게 정주<定住>하면서 자손<子孫>이 번창하고 따라서 가세<家世>가 확장되어가니 후손<後孫>들이 선대<先代>의 유공<有功>함을 조정<朝廷>에 건의하여 마침내 그 뜻을 이루어지니 이것이 숭의사<崇議祠>를 짓게 된 동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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