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태안군 태안읍 동문1~3리 573
태안읍<泰安邑> 동문리<東門里> 573번지상에서 위치<位置>한 경이정<憬夷亭>은 조선조<朝鮮朝> 정종<定宗> 원년<元年>에 창건<創建>된 누각형<樓閣形> 목조<木造> 와즙<瓦葺> 건물<建物>로서 크기는 14평(47㎡)이며 태안<泰安> 방어사<防禦使>가 군무<軍務> 집행<執行>을 수행<修行>하던 곳으로 매월<每月> 정월 보름날밤에 주민<住民>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비는 재우제<宰牛祭>를 거행<擧行>하던 곳으로도 사용되었으나 대한제국<大韓帝國> 융희원년(1907)에 재우제<宰牛祭>는 중단<中斷>되었으며 일본<日本> 강점기인 1925년 7월부터 1927년 6월까지 만 2년간 태안읍<泰安邑> 주민의 야학<夜學>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그후 틈틈이 경로당<敬老堂>으로 사용되어 오던 건물이다. 경이정<憬夷亭>이란 명칭은 오랑캐를 동경<憧憬>한다는식의 즉흥적인 자의 해석을 할수도 있으나 이 경이<憬夷>란 단어는 시경<詩經>의 노송반수의 경피회의<憬彼淮夷>에서 온 준말로서 저 회이<淮夷>를 깨달으라는 의미로 오랑캐를 경계<警戒>하라는 뜻으로서 14세기 중엽인 고려<高麗>말기로부터 조선조<朝鮮朝>초기에 걸쳐 침입해온 왜구<倭寇>로 인하여 태안군민<泰安郡民>이 겪은 수모<受侮>는 이루 말할수 없었는데 특히 1373년에는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으로 인해 태안군이 폐군<廢郡>되기도 하였다. 그 뒤 조선조<朝鮮朝>의 성종<成宗> 10년(1479)에는 경상도<慶尙道> 의성<疑城>에서 국조<國祖>인 단군<檀君> 영정을 태안으로 이안하여 국조신의 영험<靈驗>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오랑캐를 막으려고도 하였으니 이같이 외적<外敵>의 침입<侵入>이 심한 취약 지역인 태안에 방어사<防禦使>의 군무수행<群舞修行>에 필요한 건물<建物>을 짓고 다시는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으로 인해<郡>이 폐군<廢郡>되는 일이 없도록 오랑캐를 경계<警戒>한다라는 의미<意味>로 경이정<憬夷亭>이란 현판<懸板>을 붙였는데 이는 애당초 중국의 사신<使臣>을 맞이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중국<中國> 사신<使臣> 안흥항<安興港>을 통해 입조<入朝> 내왕<來往>할 때 잠시 쉬어가는 휴식처로 제공 하였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수차에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태안읍<泰安邑> 동문리<東門里> 573번지상에서 위치<位置>한 경이정<憬夷亭>은 조선조<朝鮮朝> 정종<定宗> 원년<元年>에 창건<創建>된 누각형<樓閣形> 목조<木造> 와즙<瓦葺> 건물<建物>로서 크기는 14평(47㎡)이며 태안<泰安> 방어사<防禦使>가 군무<軍務> 집행<執行>을 수행<修行>하던 곳으로 매월<每月> 정월 보름날밤에 주민<住民>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비는 재우제<宰牛祭>를 거행<擧行>하던 곳으로도 사용되었으나 대한제국<大韓帝國> 융희원년(1907)에 재우제<宰牛祭>는 중단<中斷>되었으며 일본<日本> 강점기인 1925년 7월부터 1927년 6월까지 만 2년간 태안읍<泰安邑> 주민의 야학<夜學>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그후 틈틈이 경로당<敬老堂>으로 사용되어 오던 건물이다. 경이정<憬夷亭>이란 명칭은 오랑캐를 동경<憧憬>한다는식의 즉흥적인 자의 해석을 할수도 있으나 이 경이<憬夷>란 단어는 시경<詩經>의 노송반수의 경피회의<憬彼淮夷>에서 온 준말로서 저 회이<淮夷>를 깨달으라는 의미로 오랑캐를 경계<警戒>하라는 뜻으로서 14세기 중엽인 고려<高麗>말기로부터 조선조<朝鮮朝>초기에 걸쳐 침입해온 왜구<倭寇>로 인하여 태안군민<泰安郡民>이 겪은 수모<受侮>는 이루 말할수 없었는데 특히 1373년에는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으로 인해 태안군이 폐군<廢郡>되기도 하였다. 그 뒤 조선조<朝鮮朝>의 성종<成宗> 10년(1479)에는 경상도<慶尙道> 의성<疑城>에서 국조<國祖>인 단군<檀君> 영정을 태안으로 이안하여 국조신의 영험<靈驗>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오랑캐를 막으려고도 하였으니 이같이 외적<外敵>의 침입<侵入>이 심한 취약 지역인 태안에 방어사<防禦使>의 군무수행<群舞修行>에 필요한 건물<建物>을 짓고 다시는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으로 인해<郡>이 폐군<廢郡>되는 일이 없도록 오랑캐를 경계<警戒>한다라는 의미<意味>로 경이정<憬夷亭>이란 현판<懸板>을 붙였는데 이는 애당초 중국의 사신<使臣>을 맞이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중국<中國> 사신<使臣> 안흥항<安興港>을 통해 입조<入朝> 내왕<來往>할 때 잠시 쉬어가는 휴식처로 제공 하였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수차에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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