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태안군 소원면 소근1리 산2외 13필
태안군<泰安郡> 소원면<所遠面> 소근리<所斤里>의 해안가에 자리한 둘레 656m, 높이 3.3m의 석성<石城>으로서 조선조<朝鮮朝> 중종<中宗> 9년(1514)년에 축성<築城>되었다. 이곳에 축성<築城>하게된 동기는 외침<外侵>을 막기 위해서 였는데 특히 고려<高麗>말기로부터 더욱 심하게 나타난 왜구<倭寇>로 인하여 연안의 주민들이 약탈을 당하고 심지어 피살<被殺>되는등 그 참상<慘狀>은 형언<形言>할 수 없었다. 고려의 31대 공민왕<恭愍王> 22년에는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이 몹시 혹독하여 태안군수<泰安郡守>가 겨우 한두명의 아전을 데리고 서산군에 붙임으로서 결국은 태안군<泰安郡>이 폐군<廢郡>의 비운<悲運>을 맞게 되었다. 태안군<泰安郡>이 폐군<廢郡>된지 무려 66년 뒤인 세종 21년(1439)에 새 공관<公館>을 짓고 김흔지<金흔之> 군수<郡守>가 부임<赴任>하여 그후 75년에 소근진성<所斤鎭城>이 축성<築城>되는데 이는 태안군<泰安郡>이 폐군<廢郡>된지 무려 141년 뒤에 이루어 진것으로 왜구의 침입<侵入>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東學革命>때 폐성<廢城>되어 성벽<城壁>의 일부<一部>만 남아있다.
태안군<泰安郡> 소원면<所遠面> 소근리<所斤里>의 해안가에 자리한 둘레 656m, 높이 3.3m의 석성<石城>으로서 조선조<朝鮮朝> 중종<中宗> 9년(1514)년에 축성<築城>되었다. 이곳에 축성<築城>하게된 동기는 외침<外侵>을 막기 위해서 였는데 특히 고려<高麗>말기로부터 더욱 심하게 나타난 왜구<倭寇>로 인하여 연안의 주민들이 약탈을 당하고 심지어 피살<被殺>되는등 그 참상<慘狀>은 형언<形言>할 수 없었다. 고려의 31대 공민왕<恭愍王> 22년에는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이 몹시 혹독하여 태안군수<泰安郡守>가 겨우 한두명의 아전을 데리고 서산군에 붙임으로서 결국은 태안군<泰安郡>이 폐군<廢郡>의 비운<悲運>을 맞게 되었다. 태안군<泰安郡>이 폐군<廢郡>된지 무려 66년 뒤인 세종 21년(1439)에 새 공관<公館>을 짓고 김흔지<金흔之> 군수<郡守>가 부임<赴任>하여 그후 75년에 소근진성<所斤鎭城>이 축성<築城>되는데 이는 태안군<泰安郡>이 폐군<廢郡>된지 무려 141년 뒤에 이루어 진것으로 왜구의 침입<侵入>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東學革命>때 폐성<廢城>되어 성벽<城壁>의 일부<一部>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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