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강릉시 용강동 58-1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강릉부의 객사(客舍)인 임영관 건물이 있었던 자리이다. 국보 제51호인 객사문의 뒤쪽에 있다.
임영관은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창건된 건물이다. 창건 당시 전대청을 비롯 중대청, 남청, 서헌, 월랑 등 모두 83칸에 이르는 매우 많은 건물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일제 때 이 곳에 강릉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서면서 다 헐리고 객사문만 남았다. 광복 후에 학교 건물을 헐고 강릉경찰서를 세웠으며 1993년 경찰서를 옮긴 후 이곳에 강릉시청 청사 건립이 추진됐다. 강릉시 청사 공사 당시 주변의 관상수들을 옮겨심으려고 중장비로 수목을 굴채했는데 그 때 건물지의 기단석열과 적심석으로 보이는 유구와 많은 양의 기와조각과 청자, 백자, 분청사기 조각 등이 출토되어 공사를 중지. 강릉대학교 박물관에 시굴조사를 의뢰했다.
조사 결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연꽃무늬 수막새 등이 나와 고려시대 건물지인 것으로 조사됐다. 유물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다양하게 출토, 임영관이 일제에 의해 헐릴 때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영관은 강릉부사의 관사인 칠사당(七事堂)과 더불어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지금 객사문에 걸린 현판은 고려 공민왕이 쓴 것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강릉부의 객사(客舍)인 임영관 건물이 있었던 자리이다. 국보 제51호인 객사문의 뒤쪽에 있다.
임영관은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창건된 건물이다. 창건 당시 전대청을 비롯 중대청, 남청, 서헌, 월랑 등 모두 83칸에 이르는 매우 많은 건물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일제 때 이 곳에 강릉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서면서 다 헐리고 객사문만 남았다. 광복 후에 학교 건물을 헐고 강릉경찰서를 세웠으며 1993년 경찰서를 옮긴 후 이곳에 강릉시청 청사 건립이 추진됐다. 강릉시 청사 공사 당시 주변의 관상수들을 옮겨심으려고 중장비로 수목을 굴채했는데 그 때 건물지의 기단석열과 적심석으로 보이는 유구와 많은 양의 기와조각과 청자, 백자, 분청사기 조각 등이 출토되어 공사를 중지. 강릉대학교 박물관에 시굴조사를 의뢰했다.
조사 결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연꽃무늬 수막새 등이 나와 고려시대 건물지인 것으로 조사됐다. 유물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다양하게 출토, 임영관이 일제에 의해 헐릴 때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영관은 강릉부사의 관사인 칠사당(七事堂)과 더불어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지금 객사문에 걸린 현판은 고려 공민왕이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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