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 809외 1필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이신 옥파 이종일 선생이 태어난 생가이다. 이종일(1858 ∼ 1925)선생은 1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3품에 올랐으며, 수신사 박영효와 함께 외교 사절로 일본에 다녀와서 새 문물에 접하게 되었다. 대한 제국이 성립된 이듬해 제국신문을 한글로 간행 하였으며, 그 뒤 황성신문, 대한민보등 언론에 종사 하면서 민중을 깨우치고 민족 의식을 불어 넣었다. 그후 천도교에 입교하여 보성사라는 인쇄소를 운영하였는데 기미독립선언때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국내외에 배포 하였으며, 태와관에서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일경에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선생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온 생애를 보내다 1925년 8월 31일 67세의 나이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채 생을 마쳤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 받았다.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이신 옥파 이종일 선생이 태어난 생가이다. 이종일(1858 ∼ 1925)선생은 1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3품에 올랐으며, 수신사 박영효와 함께 외교 사절로 일본에 다녀와서 새 문물에 접하게 되었다. 대한 제국이 성립된 이듬해 제국신문을 한글로 간행 하였으며, 그 뒤 황성신문, 대한민보등 언론에 종사 하면서 민중을 깨우치고 민족 의식을 불어 넣었다. 그후 천도교에 입교하여 보성사라는 인쇄소를 운영하였는데 기미독립선언때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국내외에 배포 하였으며, 태와관에서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일경에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선생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온 생애를 보내다 1925년 8월 31일 67세의 나이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채 생을 마쳤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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