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외
백야 김좌진장군이 태어나 성장하던 곳으로 고종26년(1889) 선원 김상용의 10대손인 형규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방영민하였으며 용력이 뛰어나 18세 때에는 이미 호명학교를 세워 신문학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그는 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겪은후 한성일보 이사로 있다가 3.1운동때 만주로 건너가 북노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사관연성부를 설치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 작전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등 민족자주 독립에 앞장섰다. 1925년 김혁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30년 정신, 이붕해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수석에 추임하여 재만동포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하는 한편 중국의 항일 세력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하던중 공산당원의 흉탄에 순절하였다. 새가지에는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백야 김좌진장군이 태어나 성장하던 곳으로 고종26년(1889) 선원 김상용의 10대손인 형규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방영민하였으며 용력이 뛰어나 18세 때에는 이미 호명학교를 세워 신문학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그는 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겪은후 한성일보 이사로 있다가 3.1운동때 만주로 건너가 북노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사관연성부를 설치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 작전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등 민족자주 독립에 앞장섰다. 1925년 김혁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30년 정신, 이붕해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수석에 추임하여 재만동포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하는 한편 중국의 항일 세력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하던중 공산당원의 흉탄에 순절하였다. 새가지에는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