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태안군 근흥면 정죽1∼3리
이 성은 조선시대< 朝鮮時代 > 중국< 中國 >의 사신< 使臣 >을 영접하던 곳이며 군사적< 軍事的 > 요새지< 要塞地 >이다. 효종< 孝宗 > 6년(1655)에 김석견< 金石堅 >이 조정< 朝廷 >에 상소< 上疏 >하여 왕이 충청감사< 忠淸監司 >에게 명을 내려 인근 19개 군민< 郡民 >이 동원되어 높이 3∼4m, 둘레 1,500m로 성을 쌓았다. 이 성에는 수군첨절제사< 水軍僉節制使 >를 두어 군사상 중요한 임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원래 이름은 안흥진성< 安興鎭城 >이다. 안흥성은 동학혁명< 東學革命 >(1894) 당시 성내의 일부 건물이 소실되고 폐성< 廢城 >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성의 동·서·남·북문의 형체가 완연히 남아 있어 그 당시의 위용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조선시대< 朝鮮時代 > 중국< 中國 >의 사신< 使臣 >을 영접하던 곳이며 군사적< 軍事的 > 요새지< 要塞地 >이다. 효종< 孝宗 > 6년(1655)에 김석견< 金石堅 >이 조정< 朝廷 >에 상소< 上疏 >하여 왕이 충청감사< 忠淸監司 >에게 명을 내려 인근 19개 군민< 郡民 >이 동원되어 높이 3∼4m, 둘레 1,500m로 성을 쌓았다. 이 성에는 수군첨절제사< 水軍僉節制使 >를 두어 군사상 중요한 임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원래 이름은 안흥진성< 安興鎭城 >이다. 안흥성은 동학혁명< 東學革命 >(1894) 당시 성내의 일부 건물이 소실되고 폐성< 廢城 >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성의 동·서·남·북문의 형체가 완연히 남아 있어 그 당시의 위용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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