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백련사 - 만덕산 중턱, 신라말에 창건된 백련사~ 실천중심의 수행 도량

by 넥스루비 2016. 9. 22.

1432년(세종 13) 윤회(尹淮)가 저술한 <팔도지리지>와 다산의 <만덕사지> 등의 기록에 의하면 839년(신라 46대 문성왕)에 무염(無染)화상이 창건하였으며 중요한 수도 도량으로 면모를 달리한 것은 1211년(고려 희종 7)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1163∼1245)가 크게 중창한 뒤부터이다.

고려말에는 강진지방이 세 차례나 왜구의 침입을 받아 이 절도 함께 폐허되나 조선 세종때 효령대군(孝寧大郡)의 보호를 받아 주지 행호(行乎)가 불타버린 가람을 복원하였다. 행호는 잦은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절 주위에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을 행호토성(行乎土城)이라고 한다.

그 후 효종때 3차 중수를 하고 '원묘국사 중진탑(圓妙國師 中眞塔)'과 '백련사 사적비'를 세우게 된다.1208년(희종 4)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은 원묘의 제자 원영(元營)은 1211-32년에 걸쳐 80여 칸의 대가람을 완공했으며, 이곳에서 요세(了世)가 실천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조직했다. 고려말에는 왜구에 의해 폐허화되었으나 조선 세종 때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보호아래 가람을 재건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 시왕전, 나한전, 만경루, 칠성각, 요사채등이 있다. 그외 유물로는 만덕산백련사사적비와 원묘국사중진탑이 있으며, 절 주위에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된 백련사의 동백림과 정약용의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초당 - 다산 정약용 선생이 10여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곳

지금의 절 또한 그때 쌓은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모습인데 만경루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높은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이 팔작지붕을 이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다포식 집인데 빗살무늬 창호의 8문짝 하단부에 엷게 부조된 귀면상(鬼面像)의 처리가 단연 돋보인다. 대웅전 안에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만덕산 백련사적비는 원래 고려 명종때 문신 최자(崔滋, 1188∼1260)가 지은 비였으나 없어지고 조선 숙종때 조종저(1631∼1690)가 쓴 비문으로 1681년에 세운 것이다.  거북은 앉은 키가 높은 편이고 험상궂게 생긴 눈을 한 귀부 위에 비신이 있으며 그 위에 옥개석 모양을 한 가첨석(加 石)이 놓여 있다.

댓글

최신글 전체

이미지
제목
글쓴이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