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진(鼎岩津)은 원래 위령과 함안의 경계를 흐르고 있는 남강(南江)의 도선장(渡船場)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은 이곳에 철교가 놓여있어 그 옛날의 나루터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정암나루는 강안(江岸)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나룻배에 앉아 유유히 강을 건너던 우리 선조들의 운치가 한껏 되살아 나는 이름이다.
그러나 정암진 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임진왜란(1592)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이곳에서 거둔 승첩(勝捷)을 들 수 있다.
전라도로 진격하던 왜군들이 이곳 정암나루에 이르렀을 때 기발한 유인전술로 왜병들을 모두 습지에 빠트려 전멸시켰으니 이 싸움에서 살아남은 왜병은 불과 몇 안되었다한다. 이 전투 이후 의병들은 낙동강에서 정암진에 이르는 70여리를 포진하여 창원과 웅천으로부터 함암 등지에 출몰하는 왜적을 막아내는 한편 창녕, 영산등지의 왜적을 완전 소탕하였다.
통칭으로 정암진(鼎岩津)이라 부를 때는 나루터의 양안(兩岸)을 모두 그렇게 부르기도 하나 지형적으로 엄격히 따져보면 의령쪽의 정암진이 옳다. 지금은 정암교(鼎岩橋)가 놓여진 아래 남강 물속에 흡사 솥(鼎)모양의 바위 하나을 일컬어 정암(鼎岩)이라 하고 솥바위라고도 부른다. 이 바위는 물속에 반쯤 갈아앉은 모습이 흡사 솥모양을 닮았으며 물속에 잠긴 부분은 솥발처럼 세발이 달려 있으니 갈데없이 솥바위 즉 정암(鼎岩)이다.
이 바위에는 10여 명의 인원이 능히 앉아서 놀만하고 더러는 낚시꾼도 즐기는 의령의 명물이다.
뿐 아니라 이곳 주위환경도 빼어나게 아름답고 시원하기 때문에 예부터 인근의 시인묵객(詩人墨客)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한다.
이 정암진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길목으로 예부터 부산, 김해, 창원, 마산, 함안 방면으로부터 경상도 하우도(下右道)로 출입하는 길목이 되어 크고 작은 애환을 숱하게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은 이곳에 철교가 놓여있어 그 옛날의 나루터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정암나루는 강안(江岸)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나룻배에 앉아 유유히 강을 건너던 우리 선조들의 운치가 한껏 되살아 나는 이름이다.
그러나 정암진 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임진왜란(1592)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이곳에서 거둔 승첩(勝捷)을 들 수 있다.
전라도로 진격하던 왜군들이 이곳 정암나루에 이르렀을 때 기발한 유인전술로 왜병들을 모두 습지에 빠트려 전멸시켰으니 이 싸움에서 살아남은 왜병은 불과 몇 안되었다한다. 이 전투 이후 의병들은 낙동강에서 정암진에 이르는 70여리를 포진하여 창원과 웅천으로부터 함암 등지에 출몰하는 왜적을 막아내는 한편 창녕, 영산등지의 왜적을 완전 소탕하였다.
통칭으로 정암진(鼎岩津)이라 부를 때는 나루터의 양안(兩岸)을 모두 그렇게 부르기도 하나 지형적으로 엄격히 따져보면 의령쪽의 정암진이 옳다. 지금은 정암교(鼎岩橋)가 놓여진 아래 남강 물속에 흡사 솥(鼎)모양의 바위 하나을 일컬어 정암(鼎岩)이라 하고 솥바위라고도 부른다. 이 바위는 물속에 반쯤 갈아앉은 모습이 흡사 솥모양을 닮았으며 물속에 잠긴 부분은 솥발처럼 세발이 달려 있으니 갈데없이 솥바위 즉 정암(鼎岩)이다.
이 바위에는 10여 명의 인원이 능히 앉아서 놀만하고 더러는 낚시꾼도 즐기는 의령의 명물이다.
뿐 아니라 이곳 주위환경도 빼어나게 아름답고 시원하기 때문에 예부터 인근의 시인묵객(詩人墨客)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한다.
이 정암진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길목으로 예부터 부산, 김해, 창원, 마산, 함안 방면으로부터 경상도 하우도(下右道)로 출입하는 길목이 되어 크고 작은 애환을 숱하게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