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시 본성동
의암은 촉석루 아래, 남강 푸른물에 떠있다. 이 바위엔 스무살 꽃다운 나이로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한 논개의 충절이 아로새겨져 있다.
진주병사(晉州兵使) 최경회(崔慶會)의 애기(愛妓)였던 논개는 1593년, 임진왜란 와중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죽자 촉석루에서 벌어진 왜장들의 술자리에 참석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논개는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毛谷村六助)를 이 바위로 유인해 쌍가락지 낀 손으로 껴안고 푸른 강물로 뛰어들었다. 논개의 희생이 알려지면서 진주엔 구국의 열기가 불타올랐다고 한다.
의암은 촉석루 아래, 남강 푸른물에 떠있다. 이 바위엔 스무살 꽃다운 나이로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한 논개의 충절이 아로새겨져 있다.
진주병사(晉州兵使) 최경회(崔慶會)의 애기(愛妓)였던 논개는 1593년, 임진왜란 와중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죽자 촉석루에서 벌어진 왜장들의 술자리에 참석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논개는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毛谷村六助)를 이 바위로 유인해 쌍가락지 낀 손으로 껴안고 푸른 강물로 뛰어들었다. 논개의 희생이 알려지면서 진주엔 구국의 열기가 불타올랐다고 한다.
직육면체 모양의 바위 윗면의 넓이는 가로세로가 각각 3m를 넘는다. 바위 두곳에 논개를 기리는 의암(義巖)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서쪽면에는 정대륭의 글씨가, 남쪽면에는 한몽삼의 글씨가 남아있다.
진주 사람들은 의암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으로 믿고 있다. 예로부터 의암이 강가 암벽에 와닿으면 나라에 큰 일이 생긴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논개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논개가 기생이 아닌 의병대장의 아내였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진주에서는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가 매년 한차례 열린다. 의암별제는 1800년대부터 봉행돼오다 맥이 끊겼으나 진주민속예술보존회 등이 복원해 1992년부터 재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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