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경평군태실(慶平君胎室)은 갑천에 설치된 가수원다리 옆에 있던 태봉이라 불리우는 야산에서 출토 되었다. 대전 - 논산간 국도 확장공사로 인해 태봉이 없어지게되자 1991년 8월에 발굴되어 현재는 대전광역시향토사료관에서 보관 전시하고 있다.
작은 산봉우리 정상에 240cm 깊이로 구덩이를 파고 매장되었던 태실 석함 (石函)은 몸체와 뚜껑으로 이루어졌다. 석함은 높이 142cm에 직경 115cm이며, 원통형의 몸체와 반구형의 뚜껑은 석회로 단단하게 붙여진 상태였다.
몸체에는 직경 50cm, 깊이 50cm의 둥근 홈을 파서 녹색 칠을 하였고, 다시 홈바닥에는 직경 15cm의 구멍이 뚫려있다. 다른 대부분의 태실에서도 볼 수 있는 배수용처럼 보이는 이 구멍은 태의 주인공과 땅의 기운을 연결하려는 지기감응 (地氣感應)의 풍수적인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본래 이 태실은 1934년 9월에 주민들의 신고로 조사된 적이 있다. 당신 일본인이 조사한 보고서에 의하면 석함 내부에는 비단으로 싼 이중의 백자항아리와 대리석으로 만든 태지석이 놓여 있었다 한다.
큰항아리속에 넣어진 작은항아리에서는 2조각의 금박과 동전 1개가 발견되었고, 태지석(胎地石) 앞뒤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앞면)皇明 萬曆二十八年 六月 寅時生
王子阿只氏胎
(뒤면)皇明 萬曆三十六年 一月初七日藏
태지석의 내용으로 보아 이 태실은 1600년에 낳은 왕자의 태를 1608년에 묻은 것이다. 즉 선조의 11번째 아들인 경평군(慶平君 1600-1673)으로 경평군은 선조와 온빈한씨(溫嬪韓氏)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가운데 둘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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