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
역골 마을 어귀에는 화강암으로 된 선돌형 장승 6기가 나란히 서 있다. 이 장승들은 과거 목달미 자연마을에 1기씩 서 있던 것을 옮겨 세운 것이다. 가장 최근까지 남아 잇던 역골 장승은 높이 125cm였다. 그러나 나머지 장승을 일찍 소실되어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고 단지 30여 년 전에 촬영한 사진자료를 가지고 판단하면 80cm~130cm내외인 것으로 보인다. 6기 모두 자연석으로 된 선돌형 장승이다. 1960년대 말기 조사 보고된 사진자료(이은창,「금강 상류지역이 부락제 연구」)에 의하면 6기의 장승 중 2기는 남성 성기형의 선돌이었음을 알 수 있고, 2기는 직사각형에 가까운 선돌이었으며, 나머지 2기는 크기가 매우 작고 끝에 뾰족하게 돌출된 형태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목달동 6기의 장승은 각 자연마을 어귀에 서 있던 것을 1945년 직후에 옮겨 세운 것으로, 애당초 각 마을에서 장승을 세운 시기는 분명치 않다. 다만 가장 늦게 장승을 모시기 시작한 안골에서는 50여 년 전에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그 까닭은 이웃마을에서 모두 장승을 위하는데 안골에서도 아니 모실수 없다하여 세우게 된 것이라고 한다.
또 이 목달동에는 목달미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가 옛부터 전해오고 있다. 제31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 참가종목이기도 한 이 액막이 놀이는 그 옛날에는 곳곳에 있었다하여 특히 정월 대보름날 한 해의 액을 방어하는 큰 행사로 치러졌고 돌림병이 돌 때는 놀이적 성격보다는 액맥이 마을 굿에 가까운 형태로 행해졌다 한다.
이 민속이 목달미에서 언제부터 행해졌는지 확실치 않으나 목달미, 무수리 마을이 오래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안동 권씨, 은진 송씨 등의 세거지인 이 고장은 유교학의 전통고장으로 전해오고 있고 주산인 보문산은 곳곳에 절터가 발견되는 불사가 많았던 산이었음이 확인된다. 목달미 마을의 디딜방아 액맥이 풍습도 이같은 지역적 특성이 가미되어 제가 행해지고 거촌적인 행사로 치러졌다. 디딜방아를 훔쳐 액맥이를 행하는 풍습이 그 기원이 고려 현종 때부터 펴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종이 12년 5월에 들 가운데 떠돌아다니는 들귀신을 위로하고 몰아내기 위해서 토룡(土龍)을 만들고 제사를 지낸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디딜방아로 형태가 변하였다고 전한다.
지역에 따라 각기 성격을 달리하는데 경상도 지방에서는 기우제를 지내는 풍습으로 행해졌고 전라도 지방에서는 액맥이 행해졌으며 충청도지방에서는 마을 전체의 액맥이 놀이로 계승되어 왔다는 점이 이채롭다.
더욱이 아낙네들이 함께 속옷을 벗어 액을 풀어내고 디딜방아에 걸고 흥겨운 놀이판이 되었다는 데서 민간 신앙적인 면과 오락적인 면이 동시에 곁들어져 마을 전체적인 호응이 있었던 민속으로 계승되었다.
목달미 마을에서 전해오는 민속놀이는 마을에 액운이 꼈을 때 그 액귀를 물리치기 위해서 이웃 마을의 디딜방아를 훔쳐와서는 마을 삼거리에 세우고 그 마을에서 액귀를 몰아내는 제항을 행하며 마을 사람들이 흥겹게 노는 놀이이다.
이 '디딜방아액맥이놀이'는 정월 대보름날 이웃마을의 디딜방아를 여러 사람이 상여소리를 내며 메고 와서 마을 삼거리에 세우고 액귀를 몰아내는 제향을 올리는데 여러 아낙네들의 속옷을 디딜방아다리에 걸쳐 절정에 이으렀을 때 과택의 속옷을 디딜방아에 걸치고 횃불을 피워 잔치를 벌인다. 이 때 액귀를 몰아내기 위한 춤사위나 각종 액귀들의 율동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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