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서구 괴곡동
선골 경로당에 이르기 전 왼편에 우상중과 후손들의 묘가 있는 야산 구릉 아래에 위치 한다. '우병사지팡이돌(禹兵使石杖)'로 불리우는 돌기둥은 화강석으로 된 사각기둥 모양이 다. 단면이 마름모꼴로 길이 250cm에 폭 38cm 두께 33cm의 크기이다. 평평하게 다듬어진 한면에 위에서 아래로 '우충장공석장(禹忠莊公石杖)'이란 해서체의 글이 새겨져 있다. 우병사가 생전에 집고 다니던 지팡이라 전해온다.
처음에는 지팡이돌이 유성구 송정동에 위치한 소정이 마을 앞에 있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이 지팡이돌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한다. 그후 마을이 점점 쇠퇴해지자 다른 마을 사람들이 이 지팡이돌로 다리를 놓았고, 다시 그것을 유성구 봉명동의 온천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동네로 옮겨 세웠다. 이를 우병사의 후손들이 월평동에 있었던 묘소 앞에 옮겨 세웠다. 당시 지팡이돌을 운반할 때 열 두 사람이 목도를 해서 겨우 발을 움직였다고 한다. 우병사의 묘소가 괴곡동 선골로 이장되면서 또 다시 지팡이돌도 묘소 앞으로 옮겨졌다.
석장이 세워져 있는 곳 바로 위에 우상중 3대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맨 위의 묘가 석장의 주인공인 우상중의 묘이고, 다음이 그의 아들인 우순신 묘, 맨 아래가 손자인 우서규 묘이다. 충장공 우상중의 묘는 본래 월평동 입의(立義) 마을에 있었으나 둔산지구 개발로 인해 자손들의 묘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곳의 비석과 상석은 모두 최근에 세운 것이며, 예전에 있던 묘비의 비갓과 대좌 그리고 상석은 묘 옆에 두었다. 단지 망주석만 모두 예전 것인데 위 장신부분이 매우 긴 특징이 있다. 한편 우순신의 묘에 서있는 문인석은 세부 표현이 생략되었으나 굵은 선이 매우 특징적이다.
우상중의 아들 우순신(禹舜臣)은 타고난 기품이 영특하여 어려서부터 글과 무예를 함께 익혀 일찍이 통덕랑(通德郞)에 올랐으나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후에 아들 우서규가 크게 되어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추증받았다.
우상중의 손자 우서규(禹瑞圭)는 태어난지 석달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이듬해인 두 살때는 어머니마저 죽자 할아버지인 우상중의 엄한 가르침과 정성으로 성장하였다. 1644년 태어나 1700년에 죽었으며, 숙종때에 무관으로 활동하였다. 28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1675년 선전관이 된 것을 시작으로 갑산부사(甲山府使),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황해도와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회령부사(會寧府使), 어영중군(御營中軍), 오위도총부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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