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서구 관저동 산24-1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혹은 돌멘(dolmen)이라고 불리는 거석(巨石) 기념물이다. 선사시대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 문화를 대표하는 무덤이다. 내동리 고인돌은 남방식 3기와 북방식 1기 등 모두 4기이다.
'내동리고인돌(內洞里 支石墓)' 이란 본래 위치(옛 대덕군 진잠면 내동리 산 9-1번지)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 '암소바위' 라고 불리던 이 고인돌이 학계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62년이다. 그러나 대덕군 진잠면 내동리와 기성면 관저리 일대의 27만여평에 조성되는 충남방적공장 부지에 고인돌이 들어가게 되자 1977년 8월 발굴조사를 실시한 후 현 위치인 충남방적 정문 옆 언덕으로 옮겨졌다.
모두 4기로 구성된 고인돌군은 본래 80m 높이의 구릉에 위치하고 있었다. 1, 2, 3호는 각각 2-2.5m 정도 간격을 두고 거의 한 줄로 놓여 있었고, 4호는 이들로부터 서남쪽으로 15m 가량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발굴당시 기록에 의하면 1호 고인돌 뚜껑돌(개석)의 크기는 길이가 3.25m, 너비 1.86m, 최대두께 0.48m이다. 1호의 동쪽 2m 지점에 위치한 2호 고인돌은 길이 2.42m, 너비 1.7m, 최대두께 0.48m 로 1호와 비슷하게 동북으로 기울어 있다. 이들은 뚜껑돌의 윗부분만이 땅위에 나와 있었다. 뚜껑돌 바보 밑은 생땅(생토층)으로 지하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1호와 2호 고인돌은 본래 하나이던 돌이 둘로 나뉘어진 것으로 1호 고인돌에는 돌을 자르기 위해 파놓은 홈이 일정한 간격으로 남아 있다. 3호 고인돌은 2호의 동쪽으로 2.5m 가량 떨어진 채 뚜껑돌이 지상에 나와 있었다. 크기는 길이 3.5m, 너비 1.6m, 최대두께 0.7m로 역시 돌 아래 지하구조는 남아있지 않았다. 주위에서 삼각형의 간돌화살촉과 무문토기편 약간이 발견되었다. 15m 떨어져 있는 4호 고인돌의 뚜껑돌 밑에서는 굄돌(지석)로 보이는 두 개의 돌이 발견되었다. 1, 2, 3호가 '변형고인돌' 혹은 '개석식(盖石式)고인돌' 인데 비해 4호는 이른바 '탁자식 고인돌' 혹은 '북방식 고인돌'이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덮개돌은 길이 3.5m, 너비 3.5m, 최대두께 0.95m로 앞의 고인돌보다 크다.
발굴조사 결과 이 고인돌 묘역에서는 또 다른 석관묘가 1기 더 확인되었다. 후대의 훼손 및 자연파괴 등으로 인해 출토 유물은 매우 적지만, 송국리형 토기편과 비교적 늦은 시기의 화살촉들이 확인되었다.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32호인 '칠성당이 고인돌 - 유성구 교촌동 3통 칠성당이마을 뒷산의 높이 55m 가량되는 구릉 능선에 있는 7기의 고인돌' 과는 약 1.3km 가량 떨어져 있어, 이 일대에서 비슷한 시기에 살던 무리의 무덤들로 보여진다. 4호 고인돌이 나머지와 달리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따로 떨어진 독립성을 보이고 있어 무리내의 가장의 권위가 상당히 높아지던 단계인 가부장적 세대 공동체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여진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혹은 돌멘(dolmen)이라고 불리는 거석(巨石) 기념물이다. 선사시대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 문화를 대표하는 무덤이다. 내동리 고인돌은 남방식 3기와 북방식 1기 등 모두 4기이다.
'내동리고인돌(內洞里 支石墓)' 이란 본래 위치(옛 대덕군 진잠면 내동리 산 9-1번지)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 '암소바위' 라고 불리던 이 고인돌이 학계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62년이다. 그러나 대덕군 진잠면 내동리와 기성면 관저리 일대의 27만여평에 조성되는 충남방적공장 부지에 고인돌이 들어가게 되자 1977년 8월 발굴조사를 실시한 후 현 위치인 충남방적 정문 옆 언덕으로 옮겨졌다.
모두 4기로 구성된 고인돌군은 본래 80m 높이의 구릉에 위치하고 있었다. 1, 2, 3호는 각각 2-2.5m 정도 간격을 두고 거의 한 줄로 놓여 있었고, 4호는 이들로부터 서남쪽으로 15m 가량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발굴당시 기록에 의하면 1호 고인돌 뚜껑돌(개석)의 크기는 길이가 3.25m, 너비 1.86m, 최대두께 0.48m이다. 1호의 동쪽 2m 지점에 위치한 2호 고인돌은 길이 2.42m, 너비 1.7m, 최대두께 0.48m 로 1호와 비슷하게 동북으로 기울어 있다. 이들은 뚜껑돌의 윗부분만이 땅위에 나와 있었다. 뚜껑돌 바보 밑은 생땅(생토층)으로 지하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1호와 2호 고인돌은 본래 하나이던 돌이 둘로 나뉘어진 것으로 1호 고인돌에는 돌을 자르기 위해 파놓은 홈이 일정한 간격으로 남아 있다. 3호 고인돌은 2호의 동쪽으로 2.5m 가량 떨어진 채 뚜껑돌이 지상에 나와 있었다. 크기는 길이 3.5m, 너비 1.6m, 최대두께 0.7m로 역시 돌 아래 지하구조는 남아있지 않았다. 주위에서 삼각형의 간돌화살촉과 무문토기편 약간이 발견되었다. 15m 떨어져 있는 4호 고인돌의 뚜껑돌 밑에서는 굄돌(지석)로 보이는 두 개의 돌이 발견되었다. 1, 2, 3호가 '변형고인돌' 혹은 '개석식(盖石式)고인돌' 인데 비해 4호는 이른바 '탁자식 고인돌' 혹은 '북방식 고인돌'이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덮개돌은 길이 3.5m, 너비 3.5m, 최대두께 0.95m로 앞의 고인돌보다 크다.
발굴조사 결과 이 고인돌 묘역에서는 또 다른 석관묘가 1기 더 확인되었다. 후대의 훼손 및 자연파괴 등으로 인해 출토 유물은 매우 적지만, 송국리형 토기편과 비교적 늦은 시기의 화살촉들이 확인되었다.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32호인 '칠성당이 고인돌 - 유성구 교촌동 3통 칠성당이마을 뒷산의 높이 55m 가량되는 구릉 능선에 있는 7기의 고인돌' 과는 약 1.3km 가량 떨어져 있어, 이 일대에서 비슷한 시기에 살던 무리의 무덤들로 보여진다. 4호 고인돌이 나머지와 달리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따로 떨어진 독립성을 보이고 있어 무리내의 가장의 권위가 상당히 높아지던 단계인 가부장적 세대 공동체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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