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박문수묘 - 박문수묘 (朴文秀墓)

by 넥스루비 2007. 8. 7.
충남 천안시 광덕면

어사< 御使 > 박문수< 朴文秀 >(1691∼1756)는 조선< 朝鮮 > 영조< 英祖 > 때의 공신< 功臣 >으로 자< 字 > 성보< 成甫 >, 호는 기은< 耆隱 >이고 본관< 本貫 >은 고령< 高靈 >이다. 경종< 景宗 > 3년(1723) 증광< 增廣 > 문과< 文科 >에 급제하여 한원< 翰苑 >에 뽑혔고, 영조 4년(1728)에 이인좌< 李麟佐 >의 난< 亂 >이 일어나자 종사관< 從事官 >으로 오명항< 吳命恒 >을 도와 이를 평정한 공으로 영성군< 靈城君 >에 봉< 封 >하게 되었다. 영조 5년(1729) 영남절도사< 嶺南節度使 >로 있을 때 관북< 關北 >의 수재< 水災 >를 미리 알고 영남 제민창< 濟民倉 >의 조< 粟 > 3천석을 보내어 10여주< 十餘州 >의 재민< 災民 >을 구하였으므로 후에 함흥< 咸興 > 만세교< 萬歲橋 > 옆에 북민비< 北民碑 >라는 송덕비< 頌德碑 >가 세워졌다. 왕명< 王命 >으로 여러번 어사< 御使 >로 출사< 出使 >하여 굶는 백성들의 구제에 힘썼으며 영조 17년(1741)에 어영대장< 御營大將 >이 되어 국방상 중요한 한강 하류 지역의 강화도< 江華島 >와 통진< 通津 >의 경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영조 25년(1749) 호조판서< 戶曹判書 >가 되어 탁지정례< 度支定例 >를 만들어 경비절감을 하였으며 균역법< 均役法 >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묘소< 墓所 > 전면< 前面 >에는 망주석< 望柱石 >, 묘비< 墓碑 >, 무인석< 武人石 > 등의 석물< 石物 >이 있으며 묘소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재실< 齋室 >이 있는데, 재실 내에는 어사< 御使 >의 영정< 影幀 > 2폭< 幅 >이 보관되어 있다.

댓글

최신글 전체

이미지
제목
글쓴이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