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산 18
이곳은 고려< 高麗 >의 개국공신< 開國功臣 >인 태위< 太尉 > 한란(853∼916) 공을 안장< 安葬 >한 묘소와 공의 위업을 기리는 신도비가 있는 곳이다. 원래의 묘소는 조선< 朝鮮 > 효종< 孝宗 > 10년(1659)에 노봉< 盧峯 >에 의해 파괴된 것을 후손< 後孫 >들이 숙종< 肅宗 > 16년(1690) 봉분< 封墳 >을 복원하였다고 전한다. 묘소는 원래의 모습에서 변형되었지만 고려시대의 묘비< 墓碑 >와 상석< 床石 > 등이 현존< 現存 >하고, 효종때의 문인석< 文人石 >과 용마석< 龍馬石 >이 보존되어 있어 고려 초기 묘역< 墓域 >이 이 고장에 남아 있다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묘소 바로 아래에는 영조< 英祖 > 44년(1768)에 세운 신도비가 있는데 후손 익모< 翼暮 >가 찬< 撰 >하고 광회< 光會 >가 글씨를 썼으며 덕필< 德弼 >이 전< 篆 >했다.
이곳은 고려< 高麗 >의 개국공신< 開國功臣 >인 태위< 太尉 > 한란(853∼916) 공을 안장< 安葬 >한 묘소와 공의 위업을 기리는 신도비가 있는 곳이다. 원래의 묘소는 조선< 朝鮮 > 효종< 孝宗 > 10년(1659)에 노봉< 盧峯 >에 의해 파괴된 것을 후손< 後孫 >들이 숙종< 肅宗 > 16년(1690) 봉분< 封墳 >을 복원하였다고 전한다. 묘소는 원래의 모습에서 변형되었지만 고려시대의 묘비< 墓碑 >와 상석< 床石 > 등이 현존< 現存 >하고, 효종때의 문인석< 文人石 >과 용마석< 龍馬石 >이 보존되어 있어 고려 초기 묘역< 墓域 >이 이 고장에 남아 있다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묘소 바로 아래에는 영조< 英祖 > 44년(1768)에 세운 신도비가 있는데 후손 익모< 翼暮 >가 찬< 撰 >하고 광회< 光會 >가 글씨를 썼으며 덕필< 德弼 >이 전< 篆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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