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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왕태실유적 - 태실의 형태는 공주에 있는 숙종의 태실을 모방하여 조성한 것

by 넥스루비 2007. 8. 7.
충북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 산 6-1

조선 영조<英祖>의 태실<胎室>로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청주 동쪽 2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의 태실이 있던 청주목 산내일동면 무쌍리<淸州牧 山內一東面 無雙里>는 곧 오늘의 무성리이다. 이 태실은 조선 숙종<肅宗> 21년(1695)에 장태<葬胎>한 영조(<英祖>, 1694∼1776)의 태<胎>를 영조 5년(1729)에 왕의 태실 규모와 구조에 맞도록 다시 봉축<封築>한 것이다. 태실의 형태는 공주에 있는 숙종의 태실을 모방하여 조성한 것으로 중앙에 2단으로 된 정방형의 대석 위에 계란 모양의 태실석<胎室石>과 팔각의 갓처마돌을 놓고 주위에 8개의 장대석을 팔각으로 놓고 팔각의 모서리에는 우주석<隅柱石>을 세웠다. 8면의 중앙에는 사각의 동자석을 세운 뒤 육각의 장대석을 가로 엊은 석난간을 둘렀다. 태실 앞에는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首> 상단에 조각한 태실비<胎室碑>를 세웠는데 비신의 앞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 쓰여있고 뒷면에는 "옹정7년10월14일<雍正七年十月四日建>"이라 쓰여 있다. 이 영조태실은 조선조 말기까지 나라에서 8명의 수호군을 두어 관리하였으나 1928년에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전국에 있는 태실을 관리하기가 어렵다는 구실로 태항아리만 꺼내어 서울 창경원<昌慶苑>으로 옮기면서 크게 파손되자 뒷날 태실 자리에 민묘가 들어섰고 태실비는 동민들이 마을로 옮겨 세웠는데, 1982년에 청원군에서 갓처마돌이 없는 상태로 태실을 복원하였으며 청원군에서 소장하고 있는「태실가봉의궤<胎室加封儀軌>」(필사본)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로 별도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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