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군 의성읍 상리1∼2리 579
저자< 著者 > 이탁영< 李擢英 > (중종 36, 1541∼광해 2, 1610). 자< 字 >는 자수< 子秀 >, 호< 號 >는 반계< 盤溪 > 또는 이사재< 李思齋 >, 본관< 本貫 >은 경주< 慶州 >. 영리< 營吏 >로서 임란< 壬亂 >이 발발하자 순찰사< 巡察使> 몽촌< 夢村 > 김수< 金 >의 막하< 幕下 >에 들어가 참모로 활약하였으며, 김수< 金 >가 근왕병< 勤王兵 >을 이끌고 수원< 水原 >까지 진군< 進軍 >하였을 때에도 수종< 隨從 >하여 헌책< 獻策 >한 바가 많았다. 1593년< 年 >(선조 26)에는 초논사< 招論使 >와 경상좌감사< 慶尙左監司 >를 지낸 학봉< 鶴峰 > 김성일< 金誠一 >의 막하< 幕下 >에서 초병< 招兵 > 및 모량< 募粮 > 등의 방책< 方策 >을 건의하여 전승< 戰勝 >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그리고 두 관찰사의 막하에서 대소문보< 大小文報 >를 대작< 代作 >한 바가 많은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평란후< 平亂後 > 논상< 論賞 >에는 굳이 사양하였으며 효행이 특출하였다 한다. 숙종< 肅宗 > 때 평란< 平亂 >의 공으로 통정대부< 通政大夫 > 첨지중추부사< 僉知中樞府事 >에 증직< 贈職 >되고 정조< 正祖 > 때 충효사< 忠孝祠 >가 세워졌다. 저서< 著書 >로는《정만록< 征蠻錄 >》효사재문집《< 孝思齋文集 >》이 전한다. 이《정만록< 征蠻錄 >》은 원래 저자< 著者 >가 임란시< 壬亂時 > 진중< 陣中 >에서《임진변생후일록< 壬辰變生後日錄 >》이란 제목< 題目 >으로 초< 草 >하여 두었던 것이다. 난< 亂 >이 평정< 平定 >된 선조 34년(1601)에 도체찰사< 都體察使 > 이원익< 李元翼 >이 경상감사< 慶尙監司 > 이시발< 李時發 >을 시켜 도내< 道內 >의 필< 筆 >의 후식< 後識 >이 있는데 저자< 著者 >의 충효< 忠孝 >와 재능< 才能 >을 찬양하고 있다. 곤권< 坤卷 > : 먼저, 임란< 壬亂 >의 개형< 槪況 >과 이 일록< 日錄 > 및 연혁< 沿革 > ·통문< 通文 > 등을 기록하거나 등서< 謄書 >하게 된 연유를 6면< 面 >에 걸쳐 자세히 적은 자서< 自序 >가 있고, 이어 7년 동안에 있었던 중요한 교서< 敎書 > ·상계< 狀啓 > ·통문< 通文 > ·첩보< 牒報 > ·치보< 馳報 > ·격문< 檄文 > 등을 전재< 轉載 >하고 있는데 당시 조야< 朝野 >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 資料 >다. 권말< 卷末 >에 일본< 日本 >에 피로< 被虜 >된 명인< 明人 > 허의후< 許儀後 >가 자국< 自國 >에 진달< 陣達 >한 기밀봉사< 機密封事 >를 전재하고 있는데 즉 진일본지상< 陣日本之詳 > ·진일본입구지유< 陣日本入寇之由 > ·진어구지책< 陣禦寇之策 > ·진일본관백지유< 陣日本關白之由 > ·진일본육십육국지명< 陣日本六十六國之名 > 등 6조로 당시 일본< 日本 >의 사정을 살피는 자료이다. 임란< 壬亂 >에 관한 기록< 記錄 >으로는《선묘보감< 宣廟寶鑑 >》을 비롯하여 이순신< 李舜臣 > 난중일기< 亂中日記 >》, 유성룡< 柳成龍 >《징비록< 懲琵錄 >》, 조경남< 趙慶男 >의《난중잡록< 亂中雜錄 >》, 신경< 申炅 >의《재조번방지< 再造藩邦志 >》, 이노< 李魯 >의《용사사적< 龍蛇事蹟 >》 등 수십 종< 種 >에 달하고 자필본< 自筆本 >으로서는《난중일기< 亂中日記 >》와《징비록 < 懲琵錄 >》이 대표적인 것임은 주지< 周知 >의 사실이라 하겠다. 이《정만록< 征蠻錄 >》은 위의 제기록< 諸記錄 >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당시의 적정< 敵情 >과 아군< 我軍 >의 병력배치< 兵力配置 >를 위시한 전투상황과 조야관민< 朝野官民 >의 사정을 상술< 詳述 >하고 있음은 물론 당시의 교서< 敎書 > ·유서< 諭書 > ·격문< 檄文 > ·상계< 狀啓 > ·치보< 馳報 > 등을 아울러 등초수록< 謄 收錄 >하고 있어 임란연구< 壬亂硏究 >에 큰 도움이 되는 사료< 史料 >가 될 것이다. 영리< 營吏 >의 신분으로 순찰사< 巡察使 >의 막하< 幕下 >에서 적은 일기< 日記 >이어서 가사의 제약성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한편 임진기사< 壬辰記事 >는 4월< 月 > 14일< 日 > 임란발발일< 壬亂勃發日 >로부터 기필< 起筆 >하여 그해 연말< 年末 >까지 약 10일간< 日間 > 결기< 缺記 >한 것을 제외하고 거의 완전하게 적혀 있어 어느 임진란일기< 壬辰亂日記 >보다도 충실하고 자세하다. 특히 순찰사< 巡察使 > 김수< 金 >가 근왕병< 勤王兵 >을 일으켰을 때 함양< 咸陽 >에서 출발< 出發 >, 수원< 水原 >까지 진군< 進軍 >했다가 다시 환영< 還營 >한 저간< 這間 >의 역로< 歷路 >의 일기< 日記 >는 다른 문헌< 文獻 >에서 볼 수 없는 기록인 듯하다. 그리고《정만록< 征蠻錄 >》이란 서명< 書名 >이 선조< 宣祖 >의 어정< 御定 >이란 점에서도 이 자료의 가치< 價値 >는 한층 더해진다.
저자< 著者 > 이탁영< 李擢英 > (중종 36, 1541∼광해 2, 1610). 자< 字 >는 자수< 子秀 >, 호< 號 >는 반계< 盤溪 > 또는 이사재< 李思齋 >, 본관< 本貫 >은 경주< 慶州 >. 영리< 營吏 >로서 임란< 壬亂 >이 발발하자 순찰사< 巡察使> 몽촌< 夢村 > 김수< 金 >의 막하< 幕下 >에 들어가 참모로 활약하였으며, 김수< 金 >가 근왕병< 勤王兵 >을 이끌고 수원< 水原 >까지 진군< 進軍 >하였을 때에도 수종< 隨從 >하여 헌책< 獻策 >한 바가 많았다. 1593년< 年 >(선조 26)에는 초논사< 招論使 >와 경상좌감사< 慶尙左監司 >를 지낸 학봉< 鶴峰 > 김성일< 金誠一 >의 막하< 幕下 >에서 초병< 招兵 > 및 모량< 募粮 > 등의 방책< 方策 >을 건의하여 전승< 戰勝 >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그리고 두 관찰사의 막하에서 대소문보< 大小文報 >를 대작< 代作 >한 바가 많은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평란후< 平亂後 > 논상< 論賞 >에는 굳이 사양하였으며 효행이 특출하였다 한다. 숙종< 肅宗 > 때 평란< 平亂 >의 공으로 통정대부< 通政大夫 > 첨지중추부사< 僉知中樞府事 >에 증직< 贈職 >되고 정조< 正祖 > 때 충효사< 忠孝祠 >가 세워졌다. 저서< 著書 >로는《정만록< 征蠻錄 >》효사재문집《< 孝思齋文集 >》이 전한다. 이《정만록< 征蠻錄 >》은 원래 저자< 著者 >가 임란시< 壬亂時 > 진중< 陣中 >에서《임진변생후일록< 壬辰變生後日錄 >》이란 제목< 題目 >으로 초< 草 >하여 두었던 것이다. 난< 亂 >이 평정< 平定 >된 선조 34년(1601)에 도체찰사< 都體察使 > 이원익< 李元翼 >이 경상감사< 慶尙監司 > 이시발< 李時發 >을 시켜 도내< 道內 >의 필< 筆 >의 후식< 後識 >이 있는데 저자< 著者 >의 충효< 忠孝 >와 재능< 才能 >을 찬양하고 있다. 곤권< 坤卷 > : 먼저, 임란< 壬亂 >의 개형< 槪況 >과 이 일록< 日錄 > 및 연혁< 沿革 > ·통문< 通文 > 등을 기록하거나 등서< 謄書 >하게 된 연유를 6면< 面 >에 걸쳐 자세히 적은 자서< 自序 >가 있고, 이어 7년 동안에 있었던 중요한 교서< 敎書 > ·상계< 狀啓 > ·통문< 通文 > ·첩보< 牒報 > ·치보< 馳報 > ·격문< 檄文 > 등을 전재< 轉載 >하고 있는데 당시 조야< 朝野 >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 資料 >다. 권말< 卷末 >에 일본< 日本 >에 피로< 被虜 >된 명인< 明人 > 허의후< 許儀後 >가 자국< 自國 >에 진달< 陣達 >한 기밀봉사< 機密封事 >를 전재하고 있는데 즉 진일본지상< 陣日本之詳 > ·진일본입구지유< 陣日本入寇之由 > ·진어구지책< 陣禦寇之策 > ·진일본관백지유< 陣日本關白之由 > ·진일본육십육국지명< 陣日本六十六國之名 > 등 6조로 당시 일본< 日本 >의 사정을 살피는 자료이다. 임란< 壬亂 >에 관한 기록< 記錄 >으로는《선묘보감< 宣廟寶鑑 >》을 비롯하여 이순신< 李舜臣 > 난중일기< 亂中日記 >》, 유성룡< 柳成龍 >《징비록< 懲琵錄 >》, 조경남< 趙慶男 >의《난중잡록< 亂中雜錄 >》, 신경< 申炅 >의《재조번방지< 再造藩邦志 >》, 이노< 李魯 >의《용사사적< 龍蛇事蹟 >》 등 수십 종< 種 >에 달하고 자필본< 自筆本 >으로서는《난중일기< 亂中日記 >》와《징비록 < 懲琵錄 >》이 대표적인 것임은 주지< 周知 >의 사실이라 하겠다. 이《정만록< 征蠻錄 >》은 위의 제기록< 諸記錄 >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당시의 적정< 敵情 >과 아군< 我軍 >의 병력배치< 兵力配置 >를 위시한 전투상황과 조야관민< 朝野官民 >의 사정을 상술< 詳述 >하고 있음은 물론 당시의 교서< 敎書 > ·유서< 諭書 > ·격문< 檄文 > ·상계< 狀啓 > ·치보< 馳報 > 등을 아울러 등초수록< 謄 收錄 >하고 있어 임란연구< 壬亂硏究 >에 큰 도움이 되는 사료< 史料 >가 될 것이다. 영리< 營吏 >의 신분으로 순찰사< 巡察使 >의 막하< 幕下 >에서 적은 일기< 日記 >이어서 가사의 제약성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한편 임진기사< 壬辰記事 >는 4월< 月 > 14일< 日 > 임란발발일< 壬亂勃發日 >로부터 기필< 起筆 >하여 그해 연말< 年末 >까지 약 10일간< 日間 > 결기< 缺記 >한 것을 제외하고 거의 완전하게 적혀 있어 어느 임진란일기< 壬辰亂日記 >보다도 충실하고 자세하다. 특히 순찰사< 巡察使 > 김수< 金 >가 근왕병< 勤王兵 >을 일으켰을 때 함양< 咸陽 >에서 출발< 出發 >, 수원< 水原 >까지 진군< 進軍 >했다가 다시 환영< 還營 >한 저간< 這間 >의 역로< 歷路 >의 일기< 日記 >는 다른 문헌< 文獻 >에서 볼 수 없는 기록인 듯하다. 그리고《정만록< 征蠻錄 >》이란 서명< 書名 >이 선조< 宣祖 >의 어정< 御定 >이란 점에서도 이 자료의 가치< 價値 >는 한층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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