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산132-2
고흥건의 자는 입부이고 본관은 제주이다. 그는 호성공신 영성군 고희의 큰 아들로 선조 13년에 태어났다. 그는 선조 36년(1603)에 무과에 급제 수문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아버니 영성군의 공적으로 말미암아 영원군에게 습작하였고, 6품을 받았다. 뒤에 찬화사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의 어가를 호종하였다. 이 공으로 그는 가선대부에 제수되었다. 그 뒤 연천 군수, 여산 영장을 거쳐 오위장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임금의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그는 이 때 장단 부사로 있었는데 자원하여 서문협수장을 하였다. 이 때의 공으로 충청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 그 뒤 도총부 부총관으로 서흥 부사를 거쳐 영국공신회맹에 들었으며 자헌대부로 승진되었다. 그 뒤 도총관, 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가 벼슬에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향년 76세로 죽었다. 이 비석은 고흥건이 죽은지 13년이 지나 세운 것으로 용두와 귀부의 조각이 정교하게 되었으며, 미술적 조각 작품으로도 화려하다.
고흥건의 자는 입부이고 본관은 제주이다. 그는 호성공신 영성군 고희의 큰 아들로 선조 13년에 태어났다. 그는 선조 36년(1603)에 무과에 급제 수문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아버니 영성군의 공적으로 말미암아 영원군에게 습작하였고, 6품을 받았다. 뒤에 찬화사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의 어가를 호종하였다. 이 공으로 그는 가선대부에 제수되었다. 그 뒤 연천 군수, 여산 영장을 거쳐 오위장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임금의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그는 이 때 장단 부사로 있었는데 자원하여 서문협수장을 하였다. 이 때의 공으로 충청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 그 뒤 도총부 부총관으로 서흥 부사를 거쳐 영국공신회맹에 들었으며 자헌대부로 승진되었다. 그 뒤 도총관, 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가 벼슬에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향년 76세로 죽었다. 이 비석은 고흥건이 죽은지 13년이 지나 세운 것으로 용두와 귀부의 조각이 정교하게 되었으며, 미술적 조각 작품으로도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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