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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포보수로및중건불망비 - 농경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기념물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북 순창군 동계면 현포리 산2외3필, 주월리 476

동계면(東溪面) 현포리에 소재한 기념물이다. 석축으로서 정교하고 1㎞가 넘게 축조된 현포보, 수로 및 중건불망미는 1792년(正祖 16년)에 세워진 것으로 당시의 농경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기념물이다.
옛날 현포 일대의 들은 상평(윗들)과 하평(아랫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상평은 소나기만 한차례 내려도 냇물이 넘쳐 전토(田土)를 덮쳐 농작물에 피해를 주고 하평 역시 관개시설이 없어 거의 버려진 땅으로 농민들은 매년 거듭되는 흉작을 면치 못하여 고통을 받고 있었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이 무렵 현포에 살고 잇던 김원보라는 분이 이를 보며 어떻게 하면 이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을까 늘 생각하며 지내던 중 책상에 기대어 설핏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백발 노인이 나타나 보(洑)를 개설하여 옥토(沃土)를 만들어 주민들을 기 쁘게 해주라며 그 보의 설치지점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깜짝놀라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그 길로 사동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들판으로 나와 사방을 살펴보니 과연 꿈에서 백발노인이 일러주던 곳이 그대로 보였다. 그는 서둘러 꿈에서 일러준대로 삼대(蔘帶)를 군데군데 꽂아 수로를 낼 곳을 표시했다. 그리고 당시 관아(南原府)에 고하며 수로개설을 진정했다.
남원부사는 그곳에 수리시설이 바로 필요함을 인식하고 곧바로 공사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인근마을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보를 막고 하평까지 1㎞가 넘는 거리를 석축으로 수로를 내는 공사를 중간중간 어려운 곳도 많았으나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 일을 해냈다. 당시로서는 누구나 쉽게 그 일을 구상하고 해낼 수 없는 장한 일이었다.
이로써 현포의 상·하들은 한발이나 수해를 면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가 1736년(英祖 12 년)이었다.
그 후, 흡족한 생활을 누리게 된 주민들은 김공(金公)의 고마운 은혜를 못잊어 수로 언덕 위에 불망비(不忘碑)를 세워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데, 전라북도에서는 지난 1992년 6월 20일 에 도지정(道指定)기념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김원보(金元寶)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그의 자(字)는 여관(余觀), 호는 은옹(隱翁)이라 하였다. 그의 수리사업의 공적이 영조(英祖)대왕께 알려지니 대왕은 그의 행적을 높이 치하하여 사마(司馬)에 증하고 1747년(英祖 23년)에 능참봉(陵參奉)에 봉(俸)했으나 임하지 않았다. 그 후 정조대(正祖代)에 이르러 그에게 가선대부 공조참판(嘉善大夫 工曹參判)을 증(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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