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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대최양선생유허비 - 벼슬이 사부상서 대제학에 이른 만육 최양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북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 360-2

이 비는 고려 우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부상서 대제학에 이른 만육(晩六) 최양(崔瀁)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후손과 인근의 주민들에 의해서 고종 8년(1871) 에 건립되었다.
노사 기정진이 글을 지었으며 구남각 내에 세워져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45m 폭 60m이며, 비의 전면에는 "晩六崔瀁先生遯跡遺墟碑" 라 새겨져있다.
고려 충정왕 3년(1315년)에 탄생하였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생질인 만육선생은 포은 문하에 사사하였으며, 29세때에 대과에 장원하여 여려 관직을 거쳐 보문각 대제학에 올랐다. 고려 공양왕 4년(1392년)에 외숙인 포은 선생이 선죽교에서 장절하자 진안 팔공산으로 들어가 3년간 은거했다. 태조가 두 재상 자리에 불렀으나 만육선생은 "충신은 불사이군"이라고 하고 불응했다. 그후 태조는 온양에서 완산공전 팔백결을 전록으로 주었어도 받지 아니하였다. 태조와 만육선생은 한 마을에 살았고 한 과장에서 과거를 했으며 조종출입도 같이 했다. 세종 6년(1424년) 74세에 타계했는데, 이 부음을 전해들은 세종은 3일간 조회를 폐하고 특령을 내려 만육의 자손이 등과하면 지체없이 군역을 면제하라 했다. 그리고 "학문 도덕은 정이천 같고 절의 청직은 엄광과 같다."고한 치제문을 도승지로 하여금 쓰게 했다. 태조가 저작하고 세종이 계술한 『금감록』에는 상기 사실들을 기록하여 전주이씨가 영원히 살때까지 잊지않기 위해 장서각에 비치하고 그 후손에게도 보냈다. 순조 34년(서기 1834)에 충익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만육선생의 사우인 서산서원(전주)과 고암서원(공주)은 훼손된 후 미복원상태이고, 덕암서원(임실), 영계서원(진안)에서는 봉향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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