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석축 읍성. 현재 남문인 진남문(鎭南門)과 동문, 서문이 있고 성내에 동헌(東軒), 어사(御舍), 교련청(敎練廳), 작청(作廳), 사령청(使令廳)등의 건물이 있다. 본래 해미는 정해(貞海)와 여미(餘美) 두현을 합한 지명이다.
정해현은 고려 태조때 몽웅현(夢熊縣)의 아전 한씨(韓氏)가 큰 공로가 있어 대광(大匡)의 작호를 내리고 홍주(洪州)의 속현이었던 고구현(高丘縣)을 분할하여 만든 것이다.
여미현은 본래 백제의 여촌현(餘村縣)이었던 것을 통일신라때인 757년(경덕왕 10) 여읍(餘邑)으로 고쳐 혜성군의 속현으로 한 것을 고려초기에 다시 여미라 고쳤다. 조선시대에 와서 태종 7년(1407) 정해와 여미 두현을 합하여 해미로 고치고 정해를 그 치소로 삼아 1413년 현감을 두었다.
태종 10년(1418)에 병마절도사의 병영을 덕산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성종 22년(1491)에 성벽이 완성되었고, 1651년(효종 2)에 청주로 병영을 옮겨질 때까지 군사의 중심지였다. 이 병사절도사영에는 이순신장군이 1578년 10월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로 10개월간 근무하기도 한다. (효종2년 호서병영을 5개소에 설치하였는데 전영은 홍성, 우영은 공주, 중영은 청주, 후영은 충주, 좌영은 해미에 두었다.)
「여지승람」에 의하면 당시 절도사영은 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있었으며 석성으로 둘레 3,172척, 높이 15척, 우물 3군데, 군창이 설비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해미읍지」에는 읍성의 둘레가 6,630척, 높이 13척, 치성(稚城)이 380첩(堞), 옹성(饔城)이 두 곳.
남문은 3칸이며 홍예를 틀었고, 2층의 다락을 지었으며 동문, 서문도 3칸이나 북문은 없고 우물이 여섯군데이며 성밖에 호(壕)는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초기의 병마절도사영과 읍성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 둘레에 탱자나무 울이 둘려있다고 하였으니 흔히 해미읍성을 「탱자나무성(枳城)」이라고도 하였다하나 지금 성 밖에는 탱자나무울이 없고 성안쪽에만 길게 심어져 있다.
남북으로 긴 타원형 모양을 한 해미읍성은 둘레길이가 1.8km, 넓이는 61.457평(79필지)이고 5m 높이의 성벽이 2m 남짓한 두께로 둘러있어 둘레를 걷는데 1시간 정도가 걸린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평지 읍성으로는 그 꼴이 가장 잘 남아 있어서 대표적인 표본으로 삼기 위하여 성내의 민가와 학교등을 철거하고 성벽을 보수. 1974년에는 동문ㆍ서문을 복원하였다.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c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地)가 발견되었다.
성내에는 탱자나무 울에 수령 600년된 희화나무(일명 호야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이 나무는 대원군 집정시 천주교인들을 이 나무에 묶어놓고 고문을 가했다 하며 옛 옥사가 있던 자기에 서 있어 해미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다.
해미읍성이 포함된 내포땅은 서해에서 들어오는 선진문물이 빨리 전파되므로 18세기말에 이르면 천주교세가 확산되고 그와 더불어 순교자도 늘어난다. 1866년(고종 3년)의 병인양요에 이어진 박해때에는 이 지역 천주교인들이 토포사(討捕使)가 있었던 이곳 해미영에 끌려와서 감옥에 갇히고 더러는 회화나무에 묶여 고문을 당하고 목매 달려 죽기도 했으니 김대건 신부도 이 나무에서 순교했다고 전한다. 그런가 하면 서문 밖에서는 천주교인들을 돌다리에 자래기질쳐서 죽였다고 하는데 인근 성당에서 가져간 돌다리를 제자리에 옮겨와 철팩둘러 순교의 역사를 기리고 있다. 이외에 읍성밖은 천주교인들의 성지로 순교의 순례지이기도 하다.
소중한 사진을 제공해 주신 story.kakao.com/sinansan1004 無等최광순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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