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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신장군유품 - 정충신장군유품 (鄭忠信將軍遺品)

by 넥스루비 2007. 8. 7.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740

서산군< 瑞山郡 > 지곡면< 地谷面 > 대요리< 大要里 >에는 임란< 壬亂 >에서 병자란< 丙子亂 >사이의 명장< 名將 > 정충신장군< 鄭忠信將軍 >의 사당< 祠堂 >이 있고, 그의 12대손< 代孫 > 정태규씨< 鄭太圭氏 >가 거주< 居住 >하고 있다. 이 사당< 祠堂 >에는 정충신장군< 鄭忠信將軍 >의 영정< 影幀 >과 갑< 甲 >옷, 투구, 사명기일령< 司命旗一令 >이 소장< 所藏 >되어 있었으나 지난 75년< 年 >에 이를 도난당< 盜難當 >하였다가 2개월< 2個月 >만에 찾은 일이 있다 한다. 원래< 元來 >에는 정충신장군< 鄭忠信將軍 >의 유품< 遺品 >으로 관< 棺 >과 검< 劍 >도 있었다 하나 현재< 現在 >는 없고, 투구도 75년< 年 >에 이를 훔쳐간 자< 者 >가 바다에 버렸다고 하여 현재< 現在 >는 사진< 寫眞 >만 남아있다. 이 갑< 甲 >옷은 요즈음 이순신< 李舜臣 >장군< 將軍 > 동상< 銅像 >의 갑옷이 정당< 正當 >하게 고증< 考證 >되었는가를 가름하는 중요< 重要 >한 실증적< 實證的 > 자료< 資料 >이기도 하다. 이 갑< 甲 >옷은 경주평동< 慶州平洞 >의 정씨가< 鄭氏家 > 갑< 甲 >옷, 유성룡< 柳成龍 >의 갑< 甲 >옷, 영덕< 盈德 >의 박< 朴 >수의장군< 將軍 >의 갑< 甲 >옷과 더불어 임란당시< 壬亂當時 >의 갑< 甲 >옷으로서 서로 공통점< 共通點 >을 지니고 있는데 관심< 關心 >이 쏠려있다. 이리하여 갑< 甲 >옷, 「 서군사령」< 「西軍司命」 >기< 旗 >, 향로< 香爐 >, 향합< 香盒 > 등을 일괄유물< 一括遺物 >로 하여 지정하였다. 정충신장군< 鄭忠信將軍 >은 선조< 宣祖 > 9년< 年 >(1576)에 출생< 出生 >하여 임란< 壬亂 >때는 17세의 소년< 少年 >으로 수천리< 數千里 >의 적진< 敵陣 >을 뚫고 권율장군< 權慄將軍 >의 장계< 狀啓 >를 의주< 義州 >에 전< 傳 >하고, 이괄< 李适 >의 란< 亂 >을 평정< 平定 >하고, 정묘호란< 丁卯胡亂 >(1626년)에 공을 세우고,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년) 수개월전< 數個月前 >에 병사< 病死 >하였다. 문무겸전< 文武兼全 >의 지장< 知將 >이었고, 이항복< 李恒福 >은 일찌기 「 이 사람이 만약 칼을 던지고 책< 冊 >을 대었으면 일세< 一世 >의 고사< 高士 >가 되었으리라」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아래에 임< 壬 >·병란< 丙亂 > 당시의 갑옷을 상고< 商考 >하기 위하여 그의 갑옷의 치수와 특징< 特徵 >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갑< 甲 >옷 갑옷은 목면< 木綿 > 3겹을 2cm 간격으로 호아서 누빈위에 황색단< 黃色緞 >을 입히고, 그 위에 징( 직경 1.2cm)을 사진< 寫眞 >과 같이 박았다. 어깨의 견장< 肩章 >은 철< 鐵 >로 만들었고 옷단과 소매단의 가죽선을 쳤던 것은 거의 흔적도 없다. 앞의 가슴 부분< 部分 >에만 가죽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 이 갑< 甲 >옷은 포제< 袍制 >라는 점이 특기< 特記 >할만하다. 뒷판 중심선에는 허리선까지는 직경 8.5cm의 커다란 징이 5개 박혀있고, 그 하단은 터졌다. 치수는 옷길이 116cm, 품25cm, 화장 60cm, 소매부리 40cm, 고대 13cm, 섶넓이 21.5cm, 무넓이 20cm이다. ②투구 이 투구는 75년< 年 > 도난< 盜難 >당할 당시< 當時 > 범인< 犯人 >일당< 一黨 >이 바다에 버렸다 하는 것으로 원두형< 圓兜型 >의 나무로 만든 투구로 높이가 50cm, 경< 徑 >이 40cm정도 이어서 머리에 직접 쓰기는 어려운 대형< 大型 >투구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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