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산8
계룡산은 예로부터 영산< 靈山 >으로 여겨 왔으며 삼한때에는 천태산< 天台山 >, 백제때에는 계산< 鷄山 >, 계람산< 鷄藍山 > 등으로 불리다가 신라때에는 오악< 五岳 >의 하나인 서악< 西岳 >으로 정하여 중사< 中祀 >의 제사를 지냈음. 조선시대에 와서는 북쪽으로 묘향산(상악), 남쪽으로 지리산(하악), 중앙의 계룡산(중악)에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계룡산의 중악단은 계룡산사< 鷄龍山祠 >, 계룡단< 鷄龍壇 >등으로 불리워 왔다. 당초 조선초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이성계의 명에 의하여 태조 3년(1394)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폐지되었다가 고종 16년(1879) 명성황후의 명에 의하여 재건하고 중악단이라 하였다 함. 중악단은 경사가 급한 구릉을 배경으로 평지에 가까운 구릉지에 동북·서남을 중심측으로하여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둘레에는 장방형의 담장으로 구회하였는데, 건물의 배치와 공간구성등에 있어 단묘< 壇廟 >건축의 격식과 기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음. 대문간채는 솟을삼문의 좌우로 2칸씩을 덧붙여 정면 7칸으로 구성하고 양끝에서 후면으로 2칸씩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凹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중앙문은 솟을지붕으로 되었고 삼문의 좌우칸에는 별도 소규모의 2짝판문을 달아 평상시 통용문으로 사용토록 하였으며 이들 좌우의 방들은 온돌방과 부엌 등으로 구성되었음. 중문간채 안쪽에는 비교적 넓은 마당을 조성하고 중앙부에 신도< 神道 >를 설치 하였음. 대문간채의 중앙칸 및 중문간채의 중앙칸 판문에는 신장상< 神將像 >을 그렸고, 이들의 화방벽 및 둘레의 담장에는 와편으로 수< 壽 >, 복< 福 >, 강< 康 >, 령< 寧 >, 길< 吉 >, 희< 喜 > 등의 문자와 무늬 등으로 장식하여 상징적인 의미를 두었음. 중악단 본전은 정면 3칸(8.325m), 측면3칸(5.58m)의 평면으로 내부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중앙후면에는 벽에 붙여 단을 설치하였으며, 단 위에는 감실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셔두었음. 중악단 본전의 공포는 소규모의 건물임에도 정면에는 각 칸 2조씩의 공간포를, 측면에는 각 칸 1조씩의 공간포를 배열하고 외 3출목, 내4출목의 포작을 두었으며 내·외부 살미는 조선조 말기의 특징적인 수법으로 조각, 장식되어 화려하고 위엄있게 조성되었음. 본전 단청은 부분적으로 후대에 변형된 부분이 있기는 하나 건립 당시의 수법을 살필 수 있음. 또한 각 추녀마루 위에는 각각 7개씩의 잡상을 배치하여 궁궐의 전각이나 문루 또는 도성의 문루에서 사용하던 기법을 채용한 점도 특이한 예임. 중악단의 현판은 조선후기 문신이었던 이중하< 李重夏 >(1846-1917)가 신묘년< 辛卯年 > (1891)에 쓴 것이라 함. 중악단의 역사와 건축적인 고찰 및 실측도면 등은 「계룡산 산신제 복원 조사 보고서」(1997. 8.공주시)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음.조선시대의 상악단과 하악단은 멸실되어 그 유적내용을 알 수 없으나 이곳 계룡산 중악단만은 비록 조선조 후기의 유적이나 중악단과 그 일곽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나라에서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역사적 의미가 있는 유일한 곳임.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나 왕실에 의해 건축되면서 조선조 후기의 장식적이며 특징있는 궁전 건축 양식 및 수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단묘건축물로서의 격식을 갖춘 점 등은 당시 궁궐건축에 참여했던 목수 등 우수한 기술진에 의해 이루어진 당대의 표본적인 건물로 볼 수 있음. 따라서 계룡산 중악단은 그 역사적 배경과 함께 건축사적, 기술사적 및 학술적 등으로 가치가 큰 귀중한 문화재임.
계룡산은 예로부터 영산< 靈山 >으로 여겨 왔으며 삼한때에는 천태산< 天台山 >, 백제때에는 계산< 鷄山 >, 계람산< 鷄藍山 > 등으로 불리다가 신라때에는 오악< 五岳 >의 하나인 서악< 西岳 >으로 정하여 중사< 中祀 >의 제사를 지냈음. 조선시대에 와서는 북쪽으로 묘향산(상악), 남쪽으로 지리산(하악), 중앙의 계룡산(중악)에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계룡산의 중악단은 계룡산사< 鷄龍山祠 >, 계룡단< 鷄龍壇 >등으로 불리워 왔다. 당초 조선초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이성계의 명에 의하여 태조 3년(1394)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폐지되었다가 고종 16년(1879) 명성황후의 명에 의하여 재건하고 중악단이라 하였다 함. 중악단은 경사가 급한 구릉을 배경으로 평지에 가까운 구릉지에 동북·서남을 중심측으로하여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둘레에는 장방형의 담장으로 구회하였는데, 건물의 배치와 공간구성등에 있어 단묘< 壇廟 >건축의 격식과 기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음. 대문간채는 솟을삼문의 좌우로 2칸씩을 덧붙여 정면 7칸으로 구성하고 양끝에서 후면으로 2칸씩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凹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중앙문은 솟을지붕으로 되었고 삼문의 좌우칸에는 별도 소규모의 2짝판문을 달아 평상시 통용문으로 사용토록 하였으며 이들 좌우의 방들은 온돌방과 부엌 등으로 구성되었음. 중문간채 안쪽에는 비교적 넓은 마당을 조성하고 중앙부에 신도< 神道 >를 설치 하였음. 대문간채의 중앙칸 및 중문간채의 중앙칸 판문에는 신장상< 神將像 >을 그렸고, 이들의 화방벽 및 둘레의 담장에는 와편으로 수< 壽 >, 복< 福 >, 강< 康 >, 령< 寧 >, 길< 吉 >, 희< 喜 > 등의 문자와 무늬 등으로 장식하여 상징적인 의미를 두었음. 중악단 본전은 정면 3칸(8.325m), 측면3칸(5.58m)의 평면으로 내부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중앙후면에는 벽에 붙여 단을 설치하였으며, 단 위에는 감실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셔두었음. 중악단 본전의 공포는 소규모의 건물임에도 정면에는 각 칸 2조씩의 공간포를, 측면에는 각 칸 1조씩의 공간포를 배열하고 외 3출목, 내4출목의 포작을 두었으며 내·외부 살미는 조선조 말기의 특징적인 수법으로 조각, 장식되어 화려하고 위엄있게 조성되었음. 본전 단청은 부분적으로 후대에 변형된 부분이 있기는 하나 건립 당시의 수법을 살필 수 있음. 또한 각 추녀마루 위에는 각각 7개씩의 잡상을 배치하여 궁궐의 전각이나 문루 또는 도성의 문루에서 사용하던 기법을 채용한 점도 특이한 예임. 중악단의 현판은 조선후기 문신이었던 이중하< 李重夏 >(1846-1917)가 신묘년< 辛卯年 > (1891)에 쓴 것이라 함. 중악단의 역사와 건축적인 고찰 및 실측도면 등은 「계룡산 산신제 복원 조사 보고서」(1997. 8.공주시)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음.조선시대의 상악단과 하악단은 멸실되어 그 유적내용을 알 수 없으나 이곳 계룡산 중악단만은 비록 조선조 후기의 유적이나 중악단과 그 일곽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나라에서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역사적 의미가 있는 유일한 곳임.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나 왕실에 의해 건축되면서 조선조 후기의 장식적이며 특징있는 궁전 건축 양식 및 수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단묘건축물로서의 격식을 갖춘 점 등은 당시 궁궐건축에 참여했던 목수 등 우수한 기술진에 의해 이루어진 당대의 표본적인 건물로 볼 수 있음. 따라서 계룡산 중악단은 그 역사적 배경과 함께 건축사적, 기술사적 및 학술적 등으로 가치가 큰 귀중한 문화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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