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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큰줄땡기기 - 고증자료가 없지만 대개 신라시대를 기원으로 보아야 할것 같다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남 의령군 의령읍 서동리

이곳 의령지방에서는 줄다리기란 말보다는 [큰줄땡기기]또는 [줄싸움]이란 말이 굳어 있으며 그 기원과 유래등 고증자료가 없지만 대개 신라시대를 기원으로 보아야 할것 같다.

경덕왕 때 이곳은 함안군의 속령이었으니 남강(정암강)을 경계로 [물아래][물위]편이 되어 월촌법수,군북등과 의령,가례,용덕등의 대결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뒤 1800년경부터 의령고을 행사가 되었다고 추정되므로 그 역사는 190여년이 되었다고들 말한다.

그 뒤에 와서는 의령군청에서 의병탑으로 빠지는 큰길을 경계로 지금도 [물아래,물위]로 나누어 물아래는 의령동동,남산동과 무전,용덕,정곡일부까지 한편이 되고 물위는 의령서등, 중동,상중하리와 가례,화정,칠곡,대의 일부가 같은편이 된다.

줄은 이백여개 마을에서 키크고 실한 짚을 모아서 동구밖 정자껄이나 동천에서는 장골들이 바지랑대(세발작숫대)를 설치하여 힘들여 꼬는데 [줄드리기]라 한다. 세가닥의 길이는 보통 90 ∼ 100미터가 되며 마을마다 두개의 작은 숫줄, 작은 암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작은 줄을 모아서 큰줄을 말게 되는데 대개 땡기기 2-3일전에 시작하면 100여명 넘게 동원되어야 한다. 줄은 물아래가 남줄로서 쌍줄에 큰고를 달며 물위가 숫줄로 외가닥의 줄이며 방아채(방아쇠,비녀(비내)란 말로 쓰임)를 꽂을 수 있게 만든다. 큰줄(목줄,머리줄) 은 직경이 5장정도에 길이가 200자 이상이었고 겻줄(벋줄,새끼줄,가지줄)은 양편 모두 100 가닥이 넘었다니 암줄에 켰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육일정 앞 냇바닥(지금은 의병교 아래쪽 100미터 지점)에서 정월보름날 결전의 함성을 울리면서 수십의 농악대와 횐옷에 미투리,짚신을 신은 수백의 민중들이 버틴채 늘어선 모습은 장관이었다. 양편 장수가 말을 탄 채 대기를 힘껏 흔들며 정결하고 경험 많은 원로의 지휘아래 양편비장들이 전력을 다해 고를 걸게 되고 큰 북소리에 맞춰 젖먹을때 기운까지 보태어 힘을 쓰면 그 큰줄이 들리면서 왔다갔다 하는 동안 땀과 꾀와 함성에 흔드는 깃발과 율동은 형언키 어려운 장관 그것이었다.

고를 걸지 못하면 물 아래편이 지는 것이 관례이며 비녀를 꽂지 못하게 되거나 승부가 확실치 않으면 이월 초 하루날 다시 겨루게 되어 있으며 물 아래가 이기면 그 이듬해 물이 들지 않아 대풍을 이룬다고 하며 물위편이 이기면 우순풍조하여 역시 풍년이 든다고 하니 이는 승부의 잔인한 싸움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으리라. 보통 승부가 나지않아 양편이 서로 이겼다 우기면서 미리 준비한 흰상여를 앞세우고 소복차림의 상주들이 뒤따르면서 구슬픈 호곡으로 상대편 중심도로를 행진했다. 행진하는 길은 서로 다르게 정해져 있어 마주치지 않지만 어쩌다 맞서게 되면 [길 대주기] 억지가 빌미가 되어 상여와 대기를 뺏앗아 불을 지르고 신을 벗어 던지는 등의 불상사가 있지마는 달이 기울면서 들뜬 분위기가 사라지고 동네마다 흥겨운 농악의 집돌이가 파장이 된다.

그런데 큰줄땡기기도 매년하기 어럽게 되었을 뿐 아니라 흰상여를 메고 마을을 도는 뒷놀이도 없어졌고 또 작은줄을 드리때나 큰 줄은 말때 부녀자나 상주는 절대 참여치 못하게 했고 큰줄이 완성되고 나면 양편에서 밤새 경비를 하게 되는데 그건 큰줄 속을 낫으로 끊을까해서이고 줄이 터지지 않도록 오줌도 누고 소금 물을 뿌리기도 하였다니 대단한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곳 줄땡기기는 격년제, 또는 5년 마다 개최했다고 하며 일제치하에도 두번의 큰줄땡기기를 했다. 큰줄은 땡기자는 양편의 원로들이 합의 되고 각부락에 통문이 나돌면 그때부터는 거주지 중심이 아닌 출생지 『안태본(安胎本)』가 기준이 되므로 상대편을 경계하고 후원하는 정성 때문에 일가 친척 심지어 부자간, 고부간,내외간에도 편이 갈라서게 되며 근 달포넘게 서먹서먹한 관계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고장 사람들의 정직하고 강인한 성품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소박한 정감에 상부상조하는 공동체 의식을 읽을 수 있다.

최근에 와서 격년 또는 시절의 분위기에 따라 의병제전의 중심행사로 4월22일 오후(보통 3∼4시경) 공설운동장에서 개최하며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전통민속을 보전하고 군민의 친목단결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거군적으로 참여하는 특별행사가 되었다. 농악대의 흥겨운 가락에 민중의 소박한 마음이 한데 어울리면서 신나는 한마당 놀이이며 내일을 위한 생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뜻깊은 이 행사는 좀 더 개선하면서 길이 계승시켜야 할것이며 1997년 1월30일자로 무형문화재 제 20 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김정록씨가 소유자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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