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의령군 의령읍 서동리 399
의령향교(宜寧鄕校)는 원래 동문(東門)밖(지금의 동동 소입부락(所入部落)입구)에 있던 것을 1982년(宣祖15년)에 당시의 의령현감(宜寧縣監) 이함(李涵)이 지금의 장소로 옮겨 지었다.
기록에 따르면 의령향교(宜寧鄕校)는 그뒤 숙종(肅宗) 1년 즉 1675년에 한차례 중수 (重修)한 것을 비롯하여 1820년 (純祖20년)에는 문묘(文廟)와 동서재(東西齋)를 중수하고 1849년(憲宗5년)과 1894년(高宗31년)에 두차례의 보수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시 6년뒤인 1900년에는 3년간에 걸친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으니 오늘날 의령향교 (宜寧鄕校)의 면모는 그때 다듬어진 것이라 하겠다.
근래에 와서 1974년 다시 한차례 중수(中修)를 거친 의령향교(宜寧鄕校)는 1982년 8월6일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201호로 지정되어 우리고장의 자랑꺼리로 영구히 보호받게 되었다.
그러면 이 향교(鄕校)는 어떤 곳이며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향교(鄕校)란 글자 그대로 풀어서 향리(鄕里)에 있는 학교(學校)라는 뜻이다.
이는 또 중앙에 있는 성균관(成均館)의 축소판이라 할 것이니 향교는 이태조(李太祖)의 조선개국(朝鮮開國)과 함께 교육 진흥시책의 일환으로 설치된 것이다.
즉 1392년(太祖1년) 나라에서는 도(道)의 안찰사(按擦使)로 하여금 크게 학교(學校)의 쇄신을 꾀하는 한편 부(府), 목(牧), 군(郡), 현(縣)에 각가 향교(鄕校)를 설립하도록 시달하였던 것이다.
또 이때 설립된 향교(鄕校)의 유생수(儒生數) 규모를 보면 부(府), 목(牧)에는 90명, 도호부(都護府)에 70명, 부(府)에 50명, 현(縣)에 30명이였으며 이들을 교수(敎授) 1명, 훈도(訓導) 1명이 각각 맡아서 가리켰다.
우리 의령군(宜寧郡)은 현(縣)으로 승격되면서 향교(鄕校)가 설립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년대는 알수가 없다.
또 향교(鄕校)에는 공수(公需)를 충당하기 위한 학전(學田)을 지급하였으니 일체의 비용은 학전에서 거두어 들이는 세수(稅收)로서 충당하였다.
향교에서 수학한 유생들이 1차로 과거(科擧)에 합격하면 생원(生員) 진사(進士)의 칭을 받아 다시 성균관(成均館)에 갈수도 있으며 문과시(文科試)에 응시하여 고급관원이 되는 자격을 취득하게 된다.
이 향교(鄕校)의 기능은 조선중기(朝鮮中期) 이후 곳곳에 대규모 서원(書院)이 일어나게 되면서 점차로 쇠퇴하여 오다가 1894년(高宗31년) 나라의 과거제도페지와 함게 향교(鄕校)는 명색만 남고 대신에 향사(享祀)하는 기능만을 유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향교(鄕校)의 기구로는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전사청(典祀廳) 동무(東蕪) 서무(西蕪) 신문(神門) 동제(東齊) 서재(西齋)등이 있으며, 문묘(文廟)에서는 공자(孔子)의 단신일인 음력 8월 27일에 유림(儒林)과 기관장 유지들에 의해 향사 (享祀)가 봉행된다.
또 문묘(文廟)에 배향된 이들을 보면 공자(孔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증자(曾子), 맹자(孟子)등 중국의 오성(五聖)을 비롯하여 송(宋)나라의 정호(程灝) 주희(朱熹)등 이현(二賢)을 모시고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치원(崔致遠), 설총(薛聰), 안향(安珦),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송시열 (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 김인후(金麟厚), 조헌(趙憲), 김집(金集) 등 18현(賢)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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