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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일기각판 - 송암(松巖) 이노(李魯)가 쓴 용사일기(龍蛇日記)의 각판(刻板)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남 의령군 정곡면 오방리 427-7

함휘각(含輝閣)은 건평(件坪) 5평(坪), 팔작(八作)지붕의 장판각(藏板閣)으로 1970년에 철성이씨(鐵城李氏) 문중에서 건립한 것이다.
이 함휘각(含輝閣)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영남초유사(嶺南招諭使) 김성일 (金誠一)의 막하에서 소모관(召募官)으로 많은 공을 세운 송암(松巖) 이노(李魯)가 쓴 용사일기(龍蛇日記)의 각판(刻板)48매가 보존되어 있다. 용사일기(龍蛇日記)는 송암 (松巖) 이노(李魯)가 임진왜란 중에 직접체험한 기록을 중심으로 엮은 것인바 당시 우리 의병(宜兵)들의 활약상과 전란(戰亂)의 진행과정, 또 전란중의 민심동향등을 생생하게 기록한 것인데 1592년 즉 조선 선조(宣祖) 25년에서 1597년 정유년(丁酉年)의 재란(再亂)까지 전후 5년간의 기록이 소상하게 담겨져 있다.

송암(松巖) 이노(李魯)는 1544년(中宗39년) 정곡면(正谷面) 부곡에서 태어나 일찌기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전사시(進士試)를 거쳐 1591년 문과(文科) 에 등재(登弟)하였으나, 이듬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대소헌(大笑軒) 조종도 (趙宗道)와 더불어 학봉(學峰) 김성일(金誠一)의 막하로 달려가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宜兵)을 모우는 등 크게 공헌하였다.

그뒤, 벼슬에 올라 형조자랑(刑曹佐郞) 비안현감(比安縣監)을 거쳐 사간원정언 (司諫院正言)등을 역임하였으나 이사일기(李蛇日記)용를 완성한 이듬해, 즉 1598년(宣祖31년)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버렸다.

그의 사후 오랫동안 이 용사일기(龍蛇日記)는 그대로 사장되어 왔으나 1763년 (英祖39년)에 와서야 후손인 이당혁(李堂赫)에 의해 비로소 각판(刻板)되어 세상에 퍼지게 되었던것이다.

당초 이 각판은 서문(序文) 2판 본문(本文)74판, 장계(狀啓) 7판, 발문(跋文) 5판 등 도합 88매의 각판이 발간되었으나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더러는 관리소홀 등으로 상당한 부분이 유설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절반가량인 48매의 각판(刻板)만이 보존되어 왔다.

각판의 규격은 1행(行)이 30자씩 20행으로 되어 있으며 각판의 크기는 가로 35㎝ , 세로20㎝의 목판각(木板刻)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기록으로는 흔히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장군(李舜臣將軍)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들지만 이 난중일기는 충무공의 해전(海戰)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고, 그밖에도 임난(壬亂)의 전사(戰史)를 기록한 책들이 더러 있기는 하나 이 용사일기(龍蛇日記)는 당시의 의병사(義兵史)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현재 이 용사일기의 각판(刻板)은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제62호(1973년 2월 12일 지정)로 지정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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