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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기언각판 - 미수(眉수) 허목 (許穆)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남 의령군 대의면 중촌리 845

의령군 대의면(大義面) 중촌리(中村里)845번지에 소재한 이의정(二宜亭)은 조선중기 (朝鮮中期)의 거유(巨儒)이던 미수(眉수) 허목(許穆)이 그의 아우와 함께 우거(寓居) 하던 곳이다.
처음에는 자굴산(藉堀山)아래 곡소부락(梏巢部落)에 이의정(二宜亭)을 짓고 시서(試書) 벗하며 지냈으나 그뒤 후손들에 의해 지금의 장소로 옮겨 지은 것이다.
정면(正面) 5간(間) 팔작(八作)지붕으로 된 이 이의정(二宜亭)에는 미수(眉수) 허목 (許穆)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祠堂)과 3간(間) 고사(庫舍)가 있어 이곳에는 미수기언(眉수記言) 목판각(木板刻)등 그의 유품(遺品)20여점이 보존되어 있다.

허목(許穆)은 조선중기의 사람으로 「오리정승」으로 유명한 오리(梧里) 이원익 (李元翼)의 손서(孫서)가 되는 분이다.
그는 자(字)를 화보(和甫), 호(號)는 미수(眉搜)라 하고 본관(本貫)은 양천(陽川)이니 선조(宣祖) 28년(1595년)에 현감(縣監) 허교(許喬)의 아들로 경기도 연천(璉川)에서 태어났다.

일찌기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효종(孝宗) 8년(1657년)에 뒤늦게야 출사(出仕)하여 지평(持平) 장령(掌令)을 거쳐 대사헌(大司憲)과 우의정 (右議政)을 지내고 숙종조(肅宗朝)에 이르러 마침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그의 벼슬길은 그렇게 순탄한것 만은 아니었다.
그는 벼슬에 오르자 마자 인조(仁祖)의 계비(繼妃)였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伏制) 문제로 조정에 한바탕 파란을 불러 들였으며 뒤이어 당시 북인(北人)측의 거봉(巨峰)이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는 격열한 예송(禮訟)을 빚어 그 때문에 한때는 귀양살이도 하였다.

미수(眉수) 허목(許穆)이 경상도(慶尙道)땅과 인연을 맺게된 동기는 아무래도 그의 선친 허교(許喬)의 임지가 모두 이곳 경상도 땅이였던데에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을 그의 연보(年譜)에서 간추려 보면 그의 나이 16세시에는 부친의 임지인 고령(高靈)에 살았고, 23세때는 거창(居昌), 25세때 산청(山淸), 그밖에도 창원(昌原)에는 적지않은 토지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의정(二宜亭)에 보존되어 있는 미수기언(眉수記言)의 목판각(木板刻)은 모두 921장이 있었으나 그동안 유실되고 지금은 869장이 남아있다.
가로 20자(字)세 로 18(字) 씩 각자(刻字)된 이 목판각은 미수(眉수)가 남긴 유고(遺稿) 가운데 일부이며 이 밖에도 그의 역저(力著)로 알려진 경예유찬(經禮類纂) 각판이 보존되어 있다.
한편 이 목각판은 도지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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