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칠곡군 석적면 중리 111
이 서당<書堂>은 조선<朝鮮> 효종<孝宗> 2년(1651)에 만회당 장경우<晩悔堂 張慶遇> 선생이 후진을 양성<養成>하기 위하여 석적면<石積面> 성곡리<城谷理> 화산<花山> 아래에 건립하였으나, 사림<士林>의 중론에 따라 헌종<憲宗> 6년(1840)에 이곳으로 이건<移建>하면서 묘우<廟宇>를 신축하여 봉정지소<奉亭之所>로 삼았다. 그러나 묘우<廟宇>는 고종<高宗> 8년(1871)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하여 훼철되고 지금은 강당<講堂>과 양예청<養藝廳>이 남아 있다. 만회당 장경우<晩悔堂 張慶遇>(1581∼1656)선생은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인동의병장<仁同義兵將>으로 활약하였으며, 만년에는 이곳에서 후진교육에 전념하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강당<講堂>은 정면<正面> 5칸, 측면<側面> 3칸으로 서당<書堂>으로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건물인데, 평면은 6칸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左右>에 온돌방을 꾸민 중앙협실<中央夾室>의 형태이다. 오량가<五樑架>의 팔작<八作>기와집이며, 익공<翼工>, 화반<花盤> 등은 조선시대<朝鮮時代>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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