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운문사
운문사 경내에 있는 고려 중기의 승려 원응국사 학일(學一, 1052∼1144)의 비로 높이 2.3m, 너비 91㎝이다.
현재 귀부와 이수는 상실되었고 3조각으로 절단된 비신만이 복원되었다.
비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행서(行書)로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국사의 문도들의 성명이 해서로 새겨져 있다.
원응국사의 속성은 이씨, 휘는 학일, 자는 봉거이고 아버지의 휘는 응첨, 어머니는 이씨였다.
예종이 승하한 후 즉위한 인종이 선왕의 뜻을 이어 원응을 왕사에 책봉한다.
인종 22년 10월 21일 시질(示疾)하여 12월 9일 입적하였다. 세수(世壽) 93, 법랍(法臘) 83세였다.
다음해에 국사로 봉하고 원응이란 시호를 내렸다.
비를 세운 때에 관해서는 정설이 없으나 대략 시멸년대(示滅年代) 직후인 1145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문은 자경(字經) 1.5㎝의 행서이며, 제액(題額)은 10.5㎝ 노공체(魯公體)의 행서이다.
운문사 경내에 있는 고려 중기의 승려 원응국사 학일(學一, 1052∼1144)의 비로 높이 2.3m, 너비 91㎝이다.
현재 귀부와 이수는 상실되었고 3조각으로 절단된 비신만이 복원되었다.
비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행서(行書)로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국사의 문도들의 성명이 해서로 새겨져 있다.
원응국사의 속성은 이씨, 휘는 학일, 자는 봉거이고 아버지의 휘는 응첨, 어머니는 이씨였다.
예종이 승하한 후 즉위한 인종이 선왕의 뜻을 이어 원응을 왕사에 책봉한다.
인종 22년 10월 21일 시질(示疾)하여 12월 9일 입적하였다. 세수(世壽) 93, 법랍(法臘) 83세였다.
다음해에 국사로 봉하고 원응이란 시호를 내렸다.
비를 세운 때에 관해서는 정설이 없으나 대략 시멸년대(示滅年代) 직후인 1145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문은 자경(字經) 1.5㎝의 행서이며, 제액(題額)은 10.5㎝ 노공체(魯公體)의 행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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