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17-1
1892년 5월에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은 오자마자 온갖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가운데, 농민을 함부로 징발하고 남의 산에서 수백 년 묵은 소나무를 베어다 쓰면서 보(洑)를 쌓고는 물세를 거두어들였다. 원래 정읍천(井邑川) 아래에는 배들평야 농민들이 쌓은 만석보가 있었다. 만석보는 공산보 또는 예동보 라고도 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이 보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 배들평에는 풍년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하여 만석보라고 불렀다.
조병갑(趙秉甲)은 만석보 바로 아래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로 보를 쌓게 하였다. 이 새 만석보는 너무 높아서, 홍수가 지면 오히려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의 논들이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보를 쌓은 첫해에는 수세를 물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서는 한 마지기당 두 말, 나쁜 논에서는 한 말씩 수세를 걷었다. 특히 그 무렵에는 삼남지방에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다.
보세를 감해달라고 관아로 간 농민들은 보세 감면은커녕 매를 맞고 나와야 했다. 만석보는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1894년 1월에 봉기하여 고부 관아를 점령한 농민들은 만석보로 달려가 속시원히 헐어버리고 말았다.
넓고 넓은 배들 평야를 가로지르는 방죽 위에는 1973년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건립한 만석보 유지비가 있다. 유지비 앞에 서면 앞뒤로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저편 물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아스라이 백산이 보인다.
1892년 5월에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은 오자마자 온갖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가운데, 농민을 함부로 징발하고 남의 산에서 수백 년 묵은 소나무를 베어다 쓰면서 보(洑)를 쌓고는 물세를 거두어들였다. 원래 정읍천(井邑川) 아래에는 배들평야 농민들이 쌓은 만석보가 있었다. 만석보는 공산보 또는 예동보 라고도 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이 보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 배들평에는 풍년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하여 만석보라고 불렀다.
조병갑(趙秉甲)은 만석보 바로 아래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로 보를 쌓게 하였다. 이 새 만석보는 너무 높아서, 홍수가 지면 오히려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의 논들이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보를 쌓은 첫해에는 수세를 물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서는 한 마지기당 두 말, 나쁜 논에서는 한 말씩 수세를 걷었다. 특히 그 무렵에는 삼남지방에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다.
보세를 감해달라고 관아로 간 농민들은 보세 감면은커녕 매를 맞고 나와야 했다. 만석보는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1894년 1월에 봉기하여 고부 관아를 점령한 농민들은 만석보로 달려가 속시원히 헐어버리고 말았다.
넓고 넓은 배들 평야를 가로지르는 방죽 위에는 1973년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건립한 만석보 유지비가 있다. 유지비 앞에 서면 앞뒤로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저편 물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아스라이 백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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