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조선 후기의 주택으로 입향조 소요당 박하담이 벼슬을 사양하고 금천면 신지리에 은거하면서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였다.
조선 순조 9년(1809)에 22세손 박정주가 살림집으로 건축하였으며 그 후 소요당의 12세손 운강 박시물이 크게 중건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갖추게 되었다 한다. 그 뒤 운강의 증손인 순병이 다시 중수하였다.
운강은 퇴계 이황 학파에 속하던 유치명의 문인이었다.
이 집 대문에는 김충현이 쓴 「雲岡故宅」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주택 전체의 건물배열은 사당을 맨 안쪽에 두고 그 앞에 두 개의 입구(口)자형 건물군을 결합시킨 쌍 입구자형태이다.
안채를 중심으로 한 입구자형 건물군과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또 하나의 입구자형 건물군이 결합되어 9동 80칸의 큰 집을 이루고 있다.
주택으로는 보기 드물게 그 규모가 크며 대지도 1,700여평이나 되어 두 개의 넓은 안 마당과 사당앞의 백류원 터, 안채 후원, 사랑채 후원 등 넓은 공간을 여유있게 두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큰 사랑채가 야트막한 기단위에 놓여져 있다.
안채는 큰 사랑채와 직각으로 놓인 뒷사랑방과 곳간채와 나란히 배치되었는데 북쪽 깊은 곳에 부엌을 두고 안방과 대청이 놓였으며 안사랑방인 건넌방을 두었다.
특히 안채의 안방과 대청의 툇마루 앞에 기단보다 높게 설치된 디딤널(계단형식의 긴 나무판)은 여인네들이 신발을 벗고 오르기에 편리하도록 배려한 설치이다.
안채 북쪽의 안행랑채에는 방앗간과 고방이 함께 설치되어 있고 행랑채를 위한 조그마한 부엌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큰 사랑채와 앞 동쪽의 중사랑채는 책방이 한칸 있고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있어 서당으로서의 규모를 잘 갖추고 있다.
다양한 수장고(收藏庫)와 내외분별에 치중한 설비와 공간, 주종을 명확히 구별한 측같, 서당의 존재 등은 이 집의 합리적인 구성과 다양한 기능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재 이 집은 밀양 박씨 29세손이며 입향조 소요당의 17세손인 박성욱(朴性昱, 60세)씨가 대구에 기거하면서 관리를 하고 있어 옛모습을 제대로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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