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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선생유적지 - 아무리 가뭄이 와도 마르지 않는 우물...반계의 고고한 기개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128-1

우동리는 만화(萬花), 우신(牛新), 감불(甘佛)의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반계 유형원이 살던 곳이라 하여 「반계골」이라고도 부르고 「우반동」이라고도 부른다.
유형원의 아호인 반계는 이 마을을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는 시냇물 우반천(憂磻川)에서 딴 것이라 하는데 마을 이름도 옛날에는 우반동이었는데 일제때 쓰기 쉬운 한자로 대체하면서 우동리(牛東里)로 바뀌었다 한다.

마을 뒤에는 큰 저수지 우동제가 있고 그 넘어 옥녀봉이 높이 솟아 있으며 바디재, 울바위, 설계골 하며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쳐 있고 앞에는 서해바다의 넉넉한 물과 빼어난 경관이 절경을 이룬다.
이런 산수 수려하고 비옥한 땅에 반계의 선조들은 터를 잡은 것이다.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3)은 조선 효종, 헌종때의 산실학의 선구자이다.
원래 서울 정릉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인자하고 총명했다 한다. 그의 조부는 정당을 지낸 유성민(柳成民)이고, 아버지는 검열(檢閱)을 지낸 유흥심(柳흥心)인데 그가 두 살때 부친을 잃고 북인 계열인 조부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몰락하고 만다.
15살 때는 병자호란을 만나 가족과 함께 원주로 피난을 하기도 하고 피난생활이 끝나자 그의 할아버지는 정계와 발을 끊고 부안으로 낙향한 것이다. 반계는 이원진(李元鎭)과 김세렴에게 글을 배워 나이 21세에 「백경사잠(百警四箴)」을 저술하는 등 정동직(鄭東稷)과 더불어 당시의 학계에 이름을 얻는다.

효종 4년(1653)에 큰 뜻을 품고 이곳으로 이거하게 되는데 이곳은 그의 9대조인 하정공(夏亭公) 유관(柳寬) 정승의 사패(賜牌)의 땅으로 산수가 맑고 어염시초(魚鹽柴草)까지 갖추고 있어 학문에 전념하기에 안성맞은 곳이었다. 그는 이곳의 지명을 따서 자신의 아호를 반계라 하고 일체의 관작에 나아가지 않고 20년동안 이곳에서 우거하며 이상향을 건설코자 연구하고 또 몸소 연구한 것을 실생활에 실천해 보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실학사에 길이 남을 〈반계수록(磻溪隨錄)〉 26권이다. 〈반계수록〉에는 그의 사상과 이념, 이상, 국가건설의 구상, 토지문제, 관리의 문제, 군대문제 등 「실학구시(實學求是)」의 경론이 기록되어 있고 그의 이와 같은 사상은 우리나라 실학파의 조종(祖宗)을 이루었으며 이곳 부안 땅에 싹트게 된 선봉이 된 것은 오로지 반계가 이곳에서 많은 후진과 주민속에 들어가 교육하고 실천하면서 연찬했기 때문이다.
〈반계수록〉은 영조 46년(1770) 영조의 특명에 의해 간행되어 오늘날에 까지 전해지면서 한국사상사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공재 윤두서,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환재 박규수로 이어지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로 이어진다.

그러나 지금 당산나무가 있는 곳 주변의 논 사이에 반계의 옛날 집터가 있었고 우물도 있었다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논으로 바뀌어버려 옛자취마저 찾을 길 없게 되어 버렸다.
〈반계수록〉을 썼다는 서당 집은 우신마을 옆산 월봉(月峰) 중턱 송림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집도 허물어진 것을 다시 돌담으로 둘러치고 4칸 겹집을 지어 복원하여 두고 있으며 금년(1997)에는 기와를 개와하는 일도 마쳤다.

집안과 문밖에는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반계가 살았을 때 부터 있었던 것이며 산 중턱에 있는데도 아무리 가뭄이 와도 이 우물만은 마르지 않았다니 반계의 고고한 기개같기도 하여 신기하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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