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이 비는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으로 비문의 일부가 마멸< 磨滅 >되어 정확한 판독< 判讀 >이 어려우나 신라 법흥왕< 法興王 > 11년(524)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라가 영토확장< 領土擴張 >으로 동해안지역에 실직주< 悉直州 >를 설치하고 이곳 거벌모라< 居伐牟羅 >지역을 새로 편입함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사태< 抗爭事態 >가 일어나자 신라에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육부회의< 六部會議 >를 열고 대인< 大人 >을 파견하여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비의 크기는 길이가 204cm, 글자가 새겨진 부분의 위폭 32cm, 아래폭 54.5cm이다. 비는 사각장방형의 자연석 화강암< 花崗岩 >에 한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는데, 규모는 작지만 형태는 고구려< 高句麗 > 장수왕< 長壽王 > 2년(414)에 세운 광개토왕비< 廣開土王碑 >와 유사한 고구려계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비를 통하여 신라< 新羅 > 육부제< 六部制 > 실시와 법흥왕의 율령반포< 律令頒布 >에 대한 『삼국사기< 三國史記 >』의 기록입증 등 사료< 史料 >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이 비는 1988년 3월 객토작업< 客土作業 >을 하다 우연히 발견되어 발견된 장소를 원위치로 생각하고 확인작업을 실시했으나 원위치가 아니었으며 이곳에다 비각< 碑閣 >을 세워 보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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