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391 용문사
용문사 대장전< 大藏殿 >에 봉안되어 잇는 목각탱은 1684년(숙종< 肅宗 >10년, 강희< 康熙 > 23년 )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어 지금까지 알려진 목각후불정< 木刻後佛幀 > 중 가장 이른 작품이다. 목각탱의 기본구조는 상하가 긴 장방형< 長方形 >이지만 좌우로 운문광선< 雲紋光線 >을 표현한 능형< 稜形 >의 조각을 덧붙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이같은 장엄은 다른 예에서 찾아볼 수 없는 수법으로 특히 주목된다. 조각면< 彫刻面 >의 중앙에 봉안되어 있는 본존불< 本尊佛 >은 보상당초문< 寶相唐草紋 >이 새겨진 화려한 키형 광배< 光背 >를 등지고 결가부좌< 結跏趺坐 >하고 있다. 넓적한 얼굴, 날카로운 눈, 작은 입을 꽉다문 얼굴은 불안< 佛顔 >을 성공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못한 인상으로 조선후기 불상기법 가운데 다소 떨어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형은 팽이모양으로 육계< 肉계 >표현이 생략되고 정상과 중간부분에 각각 계주< 계珠 >가 묘사되었다. 어깨는 약간 움추린 듯 표현되었지만, 앉아 있는 신체는 중후한 모습이다.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렸는데 손가락을 왼손은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여 엄지와 중지를 잡아 하품중생인< 下品中生印 >의 아미타불인< 阿彌陀佛印 >을 묘사하고 있다. 오른손을 어깨까지 올리지 않아 마치 항마촉지인< 降魔觸地印 >처럼 보이게 한 것은 올릴 경우에 생기는 기법상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방편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같은 점은 조선조 후기 조각장들의 열의가 부족하였음을 엿보게 해준다. 이같은 현상은 당대 대부분의 아미타불상 특히 목각탱이나 목불감< 木佛龕 >의 아미타상에 주로 나타난다. 통견< 通肩 >의 불의< 佛衣 >는 두터운 편이지만, 지극히 간략한 도식적인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을 구분하여 주름이 없다면 신체의 근육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본존불 이외에 대중< 大衆 >들은 사천왕< 四天王 >, 8대보살< 八大菩薩 >, 두 제자들인데 모두 상 ·중 ·하 3행< 行 >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하열< 下列 >은 사천왕상으로 본존대좌 좌우로 2구< 軀 >씩 일렬로 서 있는데, 조선조 후기 명부전< 冥府殿 >의 인왕상< 仁王像 >들과 비슷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중열< 中列 >과 상열< 上列 >에는 각기 좌우 2보살씩 모두 8대보살이 배치되었고, 상열의 보살좌우에 다시 무릎을 꿇고 합장하는 2대 제자를 배치하여 구도의 미< 美 >를 살리고 있다. 8대보살은 모두 같은 모양의 관< 冠 >, 평판적인 얼굴, 작달막한 체구, 두터운 천의< 天衣 > 등의 표현으로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불보살상 사이의 공간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하여 조각면을 보다 장엄하게 하고 있다. 이같은 목각탱 앞면에는 삼존목불좌상이 놓여져 있는데 이는 그 기법상 목불탱의 불보살과 꼭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진 원각상< 圓刻像 >이라 하겠다. 본존상의 경우 육계가 생략되었고, 반달형의 중앙계주가 표현되었으며, 신체는 중후한 모습이지만 각 부분은 둥글게 처리되었다. 또한 통견의 불의는 그 두께가 두꺼워 신체 윤곽이 선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옷주름 또한 지극히 단순화되어 도식적인 느낌을 준다. 따라서 이 본존상이 목각탱과 동일한 작가에 의해 동시에 조성된 작품임이 확실하지만 목각탱의 상< 像 >에 비해 가슴 표현 등이 비교적 유기적이며 조각기법상 어려운, 들고 있는 손을 표현한 점 등에서 조각가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의 조성기< 造成記 >가 하단에「강희이십삼년갑자계< 康熙二十三年甲子季>」라고 묵서< 墨書 >되어 있어 숙종< 肅宗 >10년(1684)에 조성된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이들 조각은 17세기 후기의 조각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높은 것이다.
용문사 대장전< 大藏殿 >에 봉안되어 잇는 목각탱은 1684년(숙종< 肅宗 >10년, 강희< 康熙 > 23년 )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어 지금까지 알려진 목각후불정< 木刻後佛幀 > 중 가장 이른 작품이다. 목각탱의 기본구조는 상하가 긴 장방형< 長方形 >이지만 좌우로 운문광선< 雲紋光線 >을 표현한 능형< 稜形 >의 조각을 덧붙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이같은 장엄은 다른 예에서 찾아볼 수 없는 수법으로 특히 주목된다. 조각면< 彫刻面 >의 중앙에 봉안되어 있는 본존불< 本尊佛 >은 보상당초문< 寶相唐草紋 >이 새겨진 화려한 키형 광배< 光背 >를 등지고 결가부좌< 結跏趺坐 >하고 있다. 넓적한 얼굴, 날카로운 눈, 작은 입을 꽉다문 얼굴은 불안< 佛顔 >을 성공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못한 인상으로 조선후기 불상기법 가운데 다소 떨어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형은 팽이모양으로 육계< 肉계 >표현이 생략되고 정상과 중간부분에 각각 계주< 계珠 >가 묘사되었다. 어깨는 약간 움추린 듯 표현되었지만, 앉아 있는 신체는 중후한 모습이다.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렸는데 손가락을 왼손은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여 엄지와 중지를 잡아 하품중생인< 下品中生印 >의 아미타불인< 阿彌陀佛印 >을 묘사하고 있다. 오른손을 어깨까지 올리지 않아 마치 항마촉지인< 降魔觸地印 >처럼 보이게 한 것은 올릴 경우에 생기는 기법상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방편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같은 점은 조선조 후기 조각장들의 열의가 부족하였음을 엿보게 해준다. 이같은 현상은 당대 대부분의 아미타불상 특히 목각탱이나 목불감< 木佛龕 >의 아미타상에 주로 나타난다. 통견< 通肩 >의 불의< 佛衣 >는 두터운 편이지만, 지극히 간략한 도식적인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을 구분하여 주름이 없다면 신체의 근육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본존불 이외에 대중< 大衆 >들은 사천왕< 四天王 >, 8대보살< 八大菩薩 >, 두 제자들인데 모두 상 ·중 ·하 3행< 行 >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하열< 下列 >은 사천왕상으로 본존대좌 좌우로 2구< 軀 >씩 일렬로 서 있는데, 조선조 후기 명부전< 冥府殿 >의 인왕상< 仁王像 >들과 비슷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중열< 中列 >과 상열< 上列 >에는 각기 좌우 2보살씩 모두 8대보살이 배치되었고, 상열의 보살좌우에 다시 무릎을 꿇고 합장하는 2대 제자를 배치하여 구도의 미< 美 >를 살리고 있다. 8대보살은 모두 같은 모양의 관< 冠 >, 평판적인 얼굴, 작달막한 체구, 두터운 천의< 天衣 > 등의 표현으로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불보살상 사이의 공간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하여 조각면을 보다 장엄하게 하고 있다. 이같은 목각탱 앞면에는 삼존목불좌상이 놓여져 있는데 이는 그 기법상 목불탱의 불보살과 꼭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진 원각상< 圓刻像 >이라 하겠다. 본존상의 경우 육계가 생략되었고, 반달형의 중앙계주가 표현되었으며, 신체는 중후한 모습이지만 각 부분은 둥글게 처리되었다. 또한 통견의 불의는 그 두께가 두꺼워 신체 윤곽이 선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옷주름 또한 지극히 단순화되어 도식적인 느낌을 준다. 따라서 이 본존상이 목각탱과 동일한 작가에 의해 동시에 조성된 작품임이 확실하지만 목각탱의 상< 像 >에 비해 가슴 표현 등이 비교적 유기적이며 조각기법상 어려운, 들고 있는 손을 표현한 점 등에서 조각가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의 조성기< 造成記 >가 하단에「강희이십삼년갑자계< 康熙二十三年甲子季>」라고 묵서< 墨書 >되어 있어 숙종< 肅宗 >10년(1684)에 조성된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이들 조각은 17세기 후기의 조각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높은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