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예천군 호명면 본리 14-2
이 건물은 약포< 藥圃 > 정탁< 鄭琢 >(1526∼1605)을 추모< 追慕 >하고 제향< 祭享 >하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묘하재실< 墓下齋室 >이다. 그는 명종< 明宗 >∼선조시< 宣祖時 >의 문신< 文臣 >으로 좌< 左 > ·우의정< 右議政 >과 영중추부사< 領中樞府使 > 등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임진란< 壬辰亂 > 때 성충< 誠忠 >을 다한 명재상< 名宰相 >이었다. 선조< 宣祖 > 36년(1603) 노년의 몸으로 사직이 윤허되어 향리인 예천으로 돌아와 보문면 고평동< 高坪洞 >에 은거를 정하였으며, 이듬해 호종공신< 扈從功臣 > 3등으로 서원부원군< 西原府院君 >에 봉해졌고, 충훈부< 忠勳府 >에서 화사< 畵師 >를 보내어 초상을 그렸다. 선조< 宣祖 > 38년 9월 고평 집에서 몰< 沒 >하니 향년 80이었다.
사후< 死後 >에 향현사< 鄕賢祠 >와 도정서원< 道正書院 >에 제향< 祭享 >되었으며, 재실< 齋室 >은 약포< 藥圃 >의 손자 시형< 時亨 >(1585∼1646)대< 代 >에 건축되었다 전< 傳 >한다. 배치는 본리< 本里 >는 옛 위라곡< 位羅谷 >의 중심으로 사라 또는 새랄마을이라 하였는데, 재실< 齋室 >은 광석산< 廣石山 >을 배산한 이 마을의 앞쪽에 위치하여 남남서향< 南南西向 >으로 자리잡았다. 재실 앞쪽은 완만하게 경사져내려 남쪽에 있는 낮은 야산과 사이에 계곡이 있어 동에서 서로 개울이 흐르는데, 약포의 묘소는 남쪽의 이 야산에 설치되어 있어 직선거리로는 약 100여m 정도 떨어져 있다. 재실은 바깥마당에 면하여 일자< 一字 > 6칸 문간채가 있고, 그 뒤에 ㅁ자 안채가 있어 튼ㅁ자< 字 >를 이루고 있으며 트인 곳은 토석담을 쌓아 안마당을 폐쇄하고 있다. 재실< 齋室 >은 자연석을 쌓은(현재는 몰탈을 발라놓음) 높은 기단위에 전면이 개방된 3칸 안대청을 놓아 중심을 이루고 서< 西 >쪽에 2칸통 상방과 앞에 1칸 부엌을 두어 서익< 西翼 >을 구성하였으며, 동< 東 >쪽에는 1칸반 큰방 앞에 1칸반 부엌을 두어 동익< 東翼 >을 이루었다. 양< 兩 > 익사< 翼舍 > 부분은 앞으로 나오면서 기단을 계단식으로 점차 낮추어 부엌바닥을 낮게하여 상부에 무리없이 다락을 시설하였다. 대청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뒷벽은 토벽을 쳤는데 각 칸의 중앙에 띠장널문을 단 영쌍창< 영雙窓 >틀이 그대로 남아있다. 상부 가구는 3량가의 간소한 구성이지만 월량< 月梁 >은 자귀로 다듬었고 키가 낮은 각대공 위에 종도리와 장혀를 놓았다. 상방은 천장을 고미반자로 꾸몄고 대청쪽 칸에는 양개 궁창널끼운 살문을 내었는데 비교적 고태를 보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마당쪽 칸에는 쪽마루를 설치하고 쌍미닫이 살문을 달았는데 문 웃틀에 가운데설주의 결구흔적이 남아있고 또 문설주에도 돌저귀를 박았던 흔적이 있어 영쌍창이 개변된 것으로 추정된다. 큰방도 천장은 고미반자로 되어있고, 부엌쪽 벽에는 다락으로 오르는 작은 외짝 살문을 내었으며, 대청으로는 두짝미서기 살문을 내었는데 이 창문은 후개< 後改 >된 것으로 보인다. 동 ·서 양익에 있는 부엌은 모두 방쪽으로 부뚜막을 설치하였고, 큰방쪽 부엌에는 동벽에 두짝열개 널판문을 달았는데, 양쪽 부엌 모두 남쪽으로 근녀에 세멘트불럭으로 반칸씩 확장하였다. 안채는 모두 자연석 초석에 방주를 세웠다. 대문채는 일< 一 >자 6칸 집으로 두짝열개 널대문을 달아놓은 대문간 서쪽에는 1칸반 아랫방과 반칸 두지가 놓여 있고, 동쪽에는 마구간 ·고방 ·방앗간 순으로 배치되었다. 두지는 안마당쪽으로 판자를 너비쪽으로 포개어 개구부를 구성하였다. 아랫방은 안마당쪽으로 외여닫이 살문을 두 곳에 내었고 바깥쪽으로는 중벽에 봉창을 하나 두었다. 마구간은 중방아래는 판벽을 치고 위에는 다락을 만들어 수장공간으로 꾸몄으며, 바깥마당에 외여닫이 널문을 내어 소가 출입케 하고 구유는 안마당쪽에 걸었다. 고방도 중방 아래는 널벽을 쳤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안마당 쪽에 두짝열개 널문을 달았다. 구조는 세멘몰탈을 마감한 기단위에 막돌 초석을 놓아 방주를 세운 3량가구 집이다. 이 건물은 17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정탁< 鄭琢 >(1529, 중종 24-1605, 선조 38)을 제향< 祭享 >하기 위해 세운 묘하재실< 墓下齋室 >이다.
이 건물은 약포< 藥圃 > 정탁< 鄭琢 >(1526∼1605)을 추모< 追慕 >하고 제향< 祭享 >하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묘하재실< 墓下齋室 >이다. 그는 명종< 明宗 >∼선조시< 宣祖時 >의 문신< 文臣 >으로 좌< 左 > ·우의정< 右議政 >과 영중추부사< 領中樞府使 > 등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임진란< 壬辰亂 > 때 성충< 誠忠 >을 다한 명재상< 名宰相 >이었다. 선조< 宣祖 > 36년(1603) 노년의 몸으로 사직이 윤허되어 향리인 예천으로 돌아와 보문면 고평동< 高坪洞 >에 은거를 정하였으며, 이듬해 호종공신< 扈從功臣 > 3등으로 서원부원군< 西原府院君 >에 봉해졌고, 충훈부< 忠勳府 >에서 화사< 畵師 >를 보내어 초상을 그렸다. 선조< 宣祖 > 38년 9월 고평 집에서 몰< 沒 >하니 향년 80이었다.
사후< 死後 >에 향현사< 鄕賢祠 >와 도정서원< 道正書院 >에 제향< 祭享 >되었으며, 재실< 齋室 >은 약포< 藥圃 >의 손자 시형< 時亨 >(1585∼1646)대< 代 >에 건축되었다 전< 傳 >한다. 배치는 본리< 本里 >는 옛 위라곡< 位羅谷 >의 중심으로 사라 또는 새랄마을이라 하였는데, 재실< 齋室 >은 광석산< 廣石山 >을 배산한 이 마을의 앞쪽에 위치하여 남남서향< 南南西向 >으로 자리잡았다. 재실 앞쪽은 완만하게 경사져내려 남쪽에 있는 낮은 야산과 사이에 계곡이 있어 동에서 서로 개울이 흐르는데, 약포의 묘소는 남쪽의 이 야산에 설치되어 있어 직선거리로는 약 100여m 정도 떨어져 있다. 재실은 바깥마당에 면하여 일자< 一字 > 6칸 문간채가 있고, 그 뒤에 ㅁ자 안채가 있어 튼ㅁ자< 字 >를 이루고 있으며 트인 곳은 토석담을 쌓아 안마당을 폐쇄하고 있다. 재실< 齋室 >은 자연석을 쌓은(현재는 몰탈을 발라놓음) 높은 기단위에 전면이 개방된 3칸 안대청을 놓아 중심을 이루고 서< 西 >쪽에 2칸통 상방과 앞에 1칸 부엌을 두어 서익< 西翼 >을 구성하였으며, 동< 東 >쪽에는 1칸반 큰방 앞에 1칸반 부엌을 두어 동익< 東翼 >을 이루었다. 양< 兩 > 익사< 翼舍 > 부분은 앞으로 나오면서 기단을 계단식으로 점차 낮추어 부엌바닥을 낮게하여 상부에 무리없이 다락을 시설하였다. 대청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뒷벽은 토벽을 쳤는데 각 칸의 중앙에 띠장널문을 단 영쌍창< 영雙窓 >틀이 그대로 남아있다. 상부 가구는 3량가의 간소한 구성이지만 월량< 月梁 >은 자귀로 다듬었고 키가 낮은 각대공 위에 종도리와 장혀를 놓았다. 상방은 천장을 고미반자로 꾸몄고 대청쪽 칸에는 양개 궁창널끼운 살문을 내었는데 비교적 고태를 보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마당쪽 칸에는 쪽마루를 설치하고 쌍미닫이 살문을 달았는데 문 웃틀에 가운데설주의 결구흔적이 남아있고 또 문설주에도 돌저귀를 박았던 흔적이 있어 영쌍창이 개변된 것으로 추정된다. 큰방도 천장은 고미반자로 되어있고, 부엌쪽 벽에는 다락으로 오르는 작은 외짝 살문을 내었으며, 대청으로는 두짝미서기 살문을 내었는데 이 창문은 후개< 後改 >된 것으로 보인다. 동 ·서 양익에 있는 부엌은 모두 방쪽으로 부뚜막을 설치하였고, 큰방쪽 부엌에는 동벽에 두짝열개 널판문을 달았는데, 양쪽 부엌 모두 남쪽으로 근녀에 세멘트불럭으로 반칸씩 확장하였다. 안채는 모두 자연석 초석에 방주를 세웠다. 대문채는 일< 一 >자 6칸 집으로 두짝열개 널대문을 달아놓은 대문간 서쪽에는 1칸반 아랫방과 반칸 두지가 놓여 있고, 동쪽에는 마구간 ·고방 ·방앗간 순으로 배치되었다. 두지는 안마당쪽으로 판자를 너비쪽으로 포개어 개구부를 구성하였다. 아랫방은 안마당쪽으로 외여닫이 살문을 두 곳에 내었고 바깥쪽으로는 중벽에 봉창을 하나 두었다. 마구간은 중방아래는 판벽을 치고 위에는 다락을 만들어 수장공간으로 꾸몄으며, 바깥마당에 외여닫이 널문을 내어 소가 출입케 하고 구유는 안마당쪽에 걸었다. 고방도 중방 아래는 널벽을 쳤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안마당 쪽에 두짝열개 널문을 달았다. 구조는 세멘몰탈을 마감한 기단위에 막돌 초석을 놓아 방주를 세운 3량가구 집이다. 이 건물은 17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정탁< 鄭琢 >(1529, 중종 24-1605, 선조 38)을 제향< 祭享 >하기 위해 세운 묘하재실< 墓下齋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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