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166-3
본< 本 > 종택< 宗宅 > 소유자< 所有者 >의 십일대조< 十一代祖 >인 초간< 草澗 > 권문해< 權文海 >(1534∼1591)는 대동운부군옥< 大東韻府郡玉 >의 찬자< 撰者 >로서 이름이 알려져 있으나 이 건물< 建物 >은 그의 조부< 祖父 >때 지은 것으로 임란전< 壬亂前 > 건축< 建築 >이라 한다. 원래는 대문간< 大門間 >채와 사랑채의 좌측< 左側 >에 연접된 부속채가 있었으나 철거되었다. 전체건물< 全體建物 >은 숲이 우거진 낮은 뒷동산을 배경삼아 다소 경사진 대지에 동남향< 東南向 >으로 좌정< 坐定 >하였다. 우측< 右側 > 전면< 前面 >으로 돌출< 突出 >한 사랑채(별당< 別堂 >)는 잡석으로 높이 쌓은 축대위에 주위< 周圍 >에 난간을 돌려 누< 樓 >집 모양으로 꾸몄으며 좌측< 左側 >의 ㄱ자< 字 >로 꺾어 후퇴< 後退 >시킨 안채도 이단< 二段 >으로 높이 쌓은 축대위에 세우고 중문< 中門 >앞에 여러 단의 계단을 설치하고 있어 건물< 建物 > 전체< 全體 >가 매우 높고 웅장하게 보이며 고졸한 맛도 풍긴다. 사당은 안채 우측< 右側 > 후방< 後方 >에 배치< 配置 >되어 있다. 안채에서 정면< 正面 > 3간중< 間中 > 좌측간< 左側間 >이 안방이고 나머지 2간< 間 >은 보방향 2간< 間 >의 우물마루를 깐 안대청으로 전면< 前面 >은 개방< 開放 >되었다. 안방의 좌측< 左側 > 건물< 建物 >의 모서리에 도장방을 단간< 單間 > 설치하여 안방과 부엌에서 출입< 出入 >하게 하였으며 도장방 앞에 안방과 접하여 마당쪽으로 부엌 3간< 間 >을 길게 뽑았다. 안대청의 우측< 右側 >에는 근년< 近年 >에 반간< 半間 >을 앞으로 확장한 간반< 間半 > 크기의 건넌방이 있고 좁아진 앞마루를 건너 안사랑 후원< 後園 >으로 통< 通 >하는 문간< 門間 >과 고방이 마당쪽으로 배치< 配置 >되어 있다. 앞채의 중문간은 안마당의 좌측< 左側 >에 치우쳐 있고 우측< 右側 >으로 아랫방 2간< 間 >과 고방 단간< 單間 >이 자리잡았으며 연접< 連接 >하여 우측< 右側 > ㄱ자형< 字形 >의 안사랑채가 놓여 사랑채와 연결< 連結 >되었다. 안사랑 부분은 안사랑방과 양면< 兩面 >이 개방< 開放 >된 마루와 사랑채 뒤쪽의 동마루에 연결< 連結 >되는 쪽마루로된 통로< 通路 > 등으로 이루어졌다. 안채는 자연석< 自然石 > 초석< 礎石 >위에 방주< 方柱 >를 세웠고 대청< 大廳 > 상부< 上部 > 가구< 架構 >는 오량가< 五梁架 >로 제형< 梯形 > 판대공< 板臺工 >을 세워 종도리< 宗道里 >를 받고 있다. 민도리에 홑처마 집으로 들보밑의 보아지는 고졸하는 모양의 초각< 草刻 >을 보이고 있다. 안대청 뒷벽에는 각각 두짝 열개의 널문이 달려 있는데 문틀의 중앙< 中央 >에는 수직으로 중간설주가 서 있으며 이러한 유구< 遺構 >는 다락에 낸 살창문에서도 볼 수 있다. 사랑채는 1967. 6. 23 보물< 寶物 > 제< 第 >457호< 號 >로 지정< 指定 >하였다. (문화재대관< 文化財大觀 > 보물편< 寶物篇 > (상< 上 >) 266P 참조 ) 사당은 3간< 間 > 정면< 正面 >의 어간< 御間 >에는 양여닫이, 협간< 夾間 >에는 외여닫이 궁판 세살문이 달려 있는데 어간< 御間 >의 문틀 중앙< 中央 >에 수직으로 중간설주가 서 있다. 그런데 이 중간설주의 단면< 斷面 >은 T자형< 字形 >으로 문받이를 겸하고 있으며 위쪽으로 밀어 올려서 떼어낼 수도 있게 되어 있다. 출입문< 出入門 >에 중간 설주가 서있는 예< 例 >는 도산서원< 陶山書院 >의 장판각에서도 볼 수 있으나 착탈식< 着脫式 >으로 된 것으로는 발견< 發見 >된 유일한 예< 例 >다. 본< 本 > 건물< 建物 >은 조선< 朝鮮 > 초기말엽< 初期末葉 >의 우수한 건축물< 建築物 >로서 보존상태< 保存狀態 >가 양호하며 특< 特 >히 중간설주의 유구등< 遺構等 >은 조선초< 朝鮮初 > ·중기< 中期 > 건축< 建築 >의 구조< 構造 >와 양식< 樣式 > 연구< 硏究 >에 중요< 重要 >한 자료< 資料 >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본< 本 > 종택< 宗宅 > 소유자< 所有者 >의 십일대조< 十一代祖 >인 초간< 草澗 > 권문해< 權文海 >(1534∼1591)는 대동운부군옥< 大東韻府郡玉 >의 찬자< 撰者 >로서 이름이 알려져 있으나 이 건물< 建物 >은 그의 조부< 祖父 >때 지은 것으로 임란전< 壬亂前 > 건축< 建築 >이라 한다. 원래는 대문간< 大門間 >채와 사랑채의 좌측< 左側 >에 연접된 부속채가 있었으나 철거되었다. 전체건물< 全體建物 >은 숲이 우거진 낮은 뒷동산을 배경삼아 다소 경사진 대지에 동남향< 東南向 >으로 좌정< 坐定 >하였다. 우측< 右側 > 전면< 前面 >으로 돌출< 突出 >한 사랑채(별당< 別堂 >)는 잡석으로 높이 쌓은 축대위에 주위< 周圍 >에 난간을 돌려 누< 樓 >집 모양으로 꾸몄으며 좌측< 左側 >의 ㄱ자< 字 >로 꺾어 후퇴< 後退 >시킨 안채도 이단< 二段 >으로 높이 쌓은 축대위에 세우고 중문< 中門 >앞에 여러 단의 계단을 설치하고 있어 건물< 建物 > 전체< 全體 >가 매우 높고 웅장하게 보이며 고졸한 맛도 풍긴다. 사당은 안채 우측< 右側 > 후방< 後方 >에 배치< 配置 >되어 있다. 안채에서 정면< 正面 > 3간중< 間中 > 좌측간< 左側間 >이 안방이고 나머지 2간< 間 >은 보방향 2간< 間 >의 우물마루를 깐 안대청으로 전면< 前面 >은 개방< 開放 >되었다. 안방의 좌측< 左側 > 건물< 建物 >의 모서리에 도장방을 단간< 單間 > 설치하여 안방과 부엌에서 출입< 出入 >하게 하였으며 도장방 앞에 안방과 접하여 마당쪽으로 부엌 3간< 間 >을 길게 뽑았다. 안대청의 우측< 右側 >에는 근년< 近年 >에 반간< 半間 >을 앞으로 확장한 간반< 間半 > 크기의 건넌방이 있고 좁아진 앞마루를 건너 안사랑 후원< 後園 >으로 통< 通 >하는 문간< 門間 >과 고방이 마당쪽으로 배치< 配置 >되어 있다. 앞채의 중문간은 안마당의 좌측< 左側 >에 치우쳐 있고 우측< 右側 >으로 아랫방 2간< 間 >과 고방 단간< 單間 >이 자리잡았으며 연접< 連接 >하여 우측< 右側 > ㄱ자형< 字形 >의 안사랑채가 놓여 사랑채와 연결< 連結 >되었다. 안사랑 부분은 안사랑방과 양면< 兩面 >이 개방< 開放 >된 마루와 사랑채 뒤쪽의 동마루에 연결< 連結 >되는 쪽마루로된 통로< 通路 > 등으로 이루어졌다. 안채는 자연석< 自然石 > 초석< 礎石 >위에 방주< 方柱 >를 세웠고 대청< 大廳 > 상부< 上部 > 가구< 架構 >는 오량가< 五梁架 >로 제형< 梯形 > 판대공< 板臺工 >을 세워 종도리< 宗道里 >를 받고 있다. 민도리에 홑처마 집으로 들보밑의 보아지는 고졸하는 모양의 초각< 草刻 >을 보이고 있다. 안대청 뒷벽에는 각각 두짝 열개의 널문이 달려 있는데 문틀의 중앙< 中央 >에는 수직으로 중간설주가 서 있으며 이러한 유구< 遺構 >는 다락에 낸 살창문에서도 볼 수 있다. 사랑채는 1967. 6. 23 보물< 寶物 > 제< 第 >457호< 號 >로 지정< 指定 >하였다. (문화재대관< 文化財大觀 > 보물편< 寶物篇 > (상< 上 >) 266P 참조 ) 사당은 3간< 間 > 정면< 正面 >의 어간< 御間 >에는 양여닫이, 협간< 夾間 >에는 외여닫이 궁판 세살문이 달려 있는데 어간< 御間 >의 문틀 중앙< 中央 >에 수직으로 중간설주가 서 있다. 그런데 이 중간설주의 단면< 斷面 >은 T자형< 字形 >으로 문받이를 겸하고 있으며 위쪽으로 밀어 올려서 떼어낼 수도 있게 되어 있다. 출입문< 出入門 >에 중간 설주가 서있는 예< 例 >는 도산서원< 陶山書院 >의 장판각에서도 볼 수 있으나 착탈식< 着脫式 >으로 된 것으로는 발견< 發見 >된 유일한 예< 例 >다. 본< 本 > 건물< 建物 >은 조선< 朝鮮 > 초기말엽< 初期末葉 >의 우수한 건축물< 建築物 >로서 보존상태< 保存狀態 >가 양호하며 특< 特 >히 중간설주의 유구등< 遺構等 >은 조선초< 朝鮮初 > ·중기< 中期 > 건축< 建築 >의 구조< 構造 >와 양식< 樣式 > 연구< 硏究 >에 중요< 重要 >한 자료< 資料 >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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