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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정 - 조선조 초기의 정원과 정자의 예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남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547

가야에서 함안으로 가는 국도 중간지점의 연못가 높은 바위 위에 세워진 정(亭)으로 조선 중종2년(1507)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지낸 무진정(無盡亭) 조삼(趙參, 1473∼?)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명종2년에 그의 호를 따서 지었다.
현 건물은 1929년 4월에 중건 한 것으로서 기둥 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이 단순 소박하게 꾸민 팔각지붕의 건물이다

1천여평의 연당과 수목이 한데 어우러진 무진정은 정면 3칸의 규모로 가운데에 방 한칸이 있고 사방에는 마루를 둘렀는데 사방의 방문을 걷어 올리면 한면의 넓다란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구조되어 있어 조선조 초기의 정원과 정자의 예로 꼽힌다.

※ 무진정(無盡亭) 조삼(趙參, 1473∼?)

무진정 조삼은 1473년(성종4)에 진산공(珍山公) 휘(諱) 동호(銅虎)의 3남으로 원화동(院化洞)에서 태어났으며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손자이다. 자는 노숙(魯叔), 휘는 삼자(參字), 호는 무진정으로 집의공파의 파조(派祖)이다.

어렸을 적부터 뛰어난 글재주와 훌륭한 도량으로 학문이 날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다 한다.
17세(1489)에 진사에 합격, 1507년(중종2)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야, 대구, 창원, 성주 등 여러 고을의 부사, 목사직을 역임하였다.
그후 통정대부, 사헌부집의 등으로 있으면서도 청렴한 생활로 위민선정(爲民善政)에 헌신하여 가는 곳마다 청빈한 명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당파싸움으로 시기와 모략을 일삼는 당시 조정에 환멸을 느끼고 낙향,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한강 정구(寒岡 鄭逑)등 거유(巨儒)들과 교류하면서 후진 양성에 여생을 보내었다.

<무진정 안내글>
이 정자는 조선 중종(中宗, 1506~1544 재위)때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무진(無盡) 조삼(趙參)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67년(명종 22)에 후손들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곳에 소장된 현판 중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쓴 무진전기(無盡亭記)에 의하면 건립 연대가 1542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미 이때 정자가 건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판은 1803년에 다시 새긴 것이며, 지금의 건물은 1929년에 중건되었다.
무진정이 서 있는 이곳 일대는 함안의 중심지로서 넓은 들판을 앞에 두고 뒤에는 얕은 언덕이 솟아 있는 곳이다. 남쪽 들판에서 개천이 흘러 북쪽 언덕 방향으로 돌아나가는 소(沼)의 위치에 물길을 돌려 아담한 연못을 만들었다. 이는 전형적인 한국식 정원으로, 주위에 나무를 심고, 풍류를 즐기기 위해 언덕 위에 정자를 세웠다. 무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기둥 위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아 소박하고 단아한 느낌을 주고 있다. 또 양 측면과 뒤쪽의 주 기둥에는 건물 내부를 가릴 수 있는 긴 문[分閤門]을 설치하였다. 이 문은 개방적인 구조로 만들었기 때문에, 닫혀 있을 때는 건축물의 외벽처럼 보이지만 열려있을 때는 건물 전체가 마치 기둥만 있는 누각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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