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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선생생가 - 수우제라고도 불리는 조촐한 선비의 가옥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3

국문학자 가람 이병기(嘉藍 李秉岐,, 1891~1968) 선생의 생가로 수우제(守愚祭)라고도 한다.

이곳은 고패형으로 된 안채와 一자형인 사랑채, 고방채, 모정 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들머리에 있었던 3칸의 행랑채와 남쪽의 부속건물 두 채는 근래에 철거되었다. 모정 전면의 두 곳에는 자그마한 못을 파놓았으며 모정 후면에는 일꾼을 위한 각각 1칸씩의 방과 부엌으로 된 외딴채가 있었으나 이것 역시 철거되었다.

안채는 잡석으로 쌓은 약 60㎝의 축대 위에 세워졌으며 안방마루, 건너방, 부엌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안방의 일부는 정지(부엌)와 이어져 있어 ㄱ자형의 고패집이 되었다. 지붕은 원래 초가였으나 기와를 얹었다가 근래에 다시 초가로 환원시켰고, 규모가 비교적 큰 안방 뒤쪽에는 찬방을 두었다. 건너방의 측면과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전면 툇마루를 군불 집힐 아궁이 출입이 편리하도록 부쩍 높여 놓아 보통집에서 볼 수 있는 짜임을 해 두었다.
수우재(守愚齋), 진수당(鎭守堂) 등의 현판이 걸려있는 4칸의 사랑채는 서(西)로부터 2칸의 사랑방, 1칸의 부엌, 그리고 1칸의 서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면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서재 곁에는 사랑마루를 두고 동쪽과 북쪽에는 낮은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사랑마루의 지붕만 높이 솟구치게 하였다.
철거된 행랑채는 각각 1칸씩의 바깥 변소와 광,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3칸의 고방채는 광, 헛간, 안변소로 이루어져 있고, 안채의 뒤에는 장독대가 있다.

건물 자체에는 이렇다 할 특징은 없으나 조촐한 선비의 가옥으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나고 있다.


* 국문학자 가람 이병기(嘉藍 李秉岐,, 1891~1968) 선생

이병기 선생은 본관이 연안(延安)이고, 호가 가람(嘉藍)이며, 전북 익산 출신으로 변호사 채(採)의 큰아들이다.

1898년부터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당대 중국의 사상가 량치챠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읽고 신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1910년 전주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재학중인 1912년 조선어 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 문법을 배움으로서 우리 한글의 소중함을 깊이 인식하게 된다.
1913년부터 교편을 잡으면서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수집한 서책은 뒷날 방대한 장서를 이루어 서울대학교에 기증하게 된다. 1921년 권덕규, 임경재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보았다.
1922년 부터 동광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고 28년에는 이를 '가요연구회(歌謠硏究會'로 개칭하여 시조혁신을 제창하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1930년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고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한때 귀향하였다가 광복 후 상경하여 군정청 편수관, 1946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1956년 정년퇴임 후 1960년 학술원임명회원이 된다.

그는 스스로 술복, 문복, 제자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그는 시조 형식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에는 <가람시조집(문장사)>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특히 묻혀있던 고전작품들, <한중록>, <인현왕후전>,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춘향가> 등을 발굴 소개하였으며 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의 판소리 연구는 단연 그 공로가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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