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대덕구 중리동 165-1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 : 1607∼1684) 선생은 조선 현종 때의 학자로서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예학<禮學>에 이름이 높았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인조 때 세자사부<世子師傅>를 지냈고, 이조참의<吏曹參議>, 승지<承旨>,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내는 동안 국정<國政>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숙종 원년(1675) 복상<服喪>문제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 남인<南人>의 배척을 받아 영변에 유배된지 5년만에 풀려났다. 특히 효종 때는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과 함께 북벌계획<北伐計劃>에 참여하였다. 이 유고<遺稿>는 선생이 영변에 유배되어 있을 때 쓴 가훈이다. 이 때 나이 73세로 돌아갈 기약이 막연한 심정에서 가정일을 부탁한 내용으로 19개 부분에 대하여 적어보낸 것이다. 1. 사당지의<祠堂之儀> 2. 시제지의<時祭之儀> 3. 기제지의<忌祭之儀> 4. 묘제지의<墓祭之儀> 5. 상장지의<喪葬之儀> 6. 거실지의<居室之儀> 7. 제산지의<制産之儀> 8. 중절지의<崇節之儀> 9. 불무지의<不虞之儀> 10. 매전지의<買田之儀> 11. 치포전지의<治浦田之儀> 12. 가연지의<家宴之儀> 13. 대빈지의<待貧之儀> 14. 화수지의<花樹之儀> 15. 관혼지의<冠昏之儀> 16. 사상지계<四喪之契> 17. 거향지도<居鄕之道> 18. 대고구지도<待故舊之道> 19. 처세지도<處世之道>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 : 1607∼1684) 선생은 조선 현종 때의 학자로서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예학<禮學>에 이름이 높았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인조 때 세자사부<世子師傅>를 지냈고, 이조참의<吏曹參議>, 승지<承旨>,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내는 동안 국정<國政>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숙종 원년(1675) 복상<服喪>문제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 남인<南人>의 배척을 받아 영변에 유배된지 5년만에 풀려났다. 특히 효종 때는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과 함께 북벌계획<北伐計劃>에 참여하였다. 이 유고<遺稿>는 선생이 영변에 유배되어 있을 때 쓴 가훈이다. 이 때 나이 73세로 돌아갈 기약이 막연한 심정에서 가정일을 부탁한 내용으로 19개 부분에 대하여 적어보낸 것이다. 1. 사당지의<祠堂之儀> 2. 시제지의<時祭之儀> 3. 기제지의<忌祭之儀> 4. 묘제지의<墓祭之儀> 5. 상장지의<喪葬之儀> 6. 거실지의<居室之儀> 7. 제산지의<制産之儀> 8. 중절지의<崇節之儀> 9. 불무지의<不虞之儀> 10. 매전지의<買田之儀> 11. 치포전지의<治浦田之儀> 12. 가연지의<家宴之儀> 13. 대빈지의<待貧之儀> 14. 화수지의<花樹之儀> 15. 관혼지의<冠昏之儀> 16. 사상지계<四喪之契> 17. 거향지도<居鄕之道> 18. 대고구지도<待故舊之道> 19. 처세지도<處世之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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