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대덕구 읍내동 74-4
제월당 송규렴<霽月堂 宋奎濂 : 1630∼1709> 선생은 효종 4년(1653)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의 전적<典籍>과 삼사<三司>의 언관<言官>을 두루 거치고, 현종 4년(1663)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지낸 후 관직에서 물러나 회덕<懷德>으로 돌아와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후 일시 관직에 나아갔으나 숙종이 즉위한 후 그의 두 스승인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이 유배당함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이 건물을 지었다(현종 2년, 1676). 건물 이름을 「제월<霽月>」이라 한 것은 그의 선조 쌍청당 송유<雙淸堂 宋愉>가 마음속에 깊이 담고자 했던 광풍<光風>과 제월<霽月>의 쌍청<雙淸>중에 하나인 제월을 취했음이며, 이는 선조의 맑은 뜻을 잇고자 함이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제월당 건물은 홑처마 민도리집이다. 옥오재는 ㄷ자형 평면에 안채와 사랑채를 겸하게 꾸민 전통적인 민가양식으로서, 옥오재 송상기(<玉吾齋 宋相琦> : 1657∼1723, 제월당 송규렴의 아들)가 지은 건물이다. 자신의 호와 건물 이름을 「옥오<玉吾>」라고 한 것은 차라리 깨어지더라도 옥<玉>을 택하겠다는 소신 즉,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도 충성스러운 말과 도의를 지키기 위해서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기개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선생은 경종 2년(1722, 신임사화<辛壬士禍>)에 강진에 유배되어 유배소<流配所>에서 별세하는 최후를 맞이해도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선생은 대제학<大提學>,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문정<文貞>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제월당 송규렴<霽月堂 宋奎濂 : 1630∼1709> 선생은 효종 4년(1653)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의 전적<典籍>과 삼사<三司>의 언관<言官>을 두루 거치고, 현종 4년(1663)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지낸 후 관직에서 물러나 회덕<懷德>으로 돌아와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후 일시 관직에 나아갔으나 숙종이 즉위한 후 그의 두 스승인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이 유배당함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이 건물을 지었다(현종 2년, 1676). 건물 이름을 「제월<霽月>」이라 한 것은 그의 선조 쌍청당 송유<雙淸堂 宋愉>가 마음속에 깊이 담고자 했던 광풍<光風>과 제월<霽月>의 쌍청<雙淸>중에 하나인 제월을 취했음이며, 이는 선조의 맑은 뜻을 잇고자 함이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제월당 건물은 홑처마 민도리집이다. 옥오재는 ㄷ자형 평면에 안채와 사랑채를 겸하게 꾸민 전통적인 민가양식으로서, 옥오재 송상기(<玉吾齋 宋相琦> : 1657∼1723, 제월당 송규렴의 아들)가 지은 건물이다. 자신의 호와 건물 이름을 「옥오<玉吾>」라고 한 것은 차라리 깨어지더라도 옥<玉>을 택하겠다는 소신 즉,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도 충성스러운 말과 도의를 지키기 위해서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기개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선생은 경종 2년(1722, 신임사화<辛壬士禍>)에 강진에 유배되어 유배소<流配所>에서 별세하는 최후를 맞이해도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선생은 대제학<大提學>,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문정<文貞>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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