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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귀애정 - 두 형제의 학덕과 사상을 흠모하고 또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영천시 화남면 귀호리 644

귀애<龜厓> 조극승<曺克承>은 본관<本貫>이 창녕<昌寧>이고 자<字>는 경휴<景休>로 1803년(순조 3년) 지금의 경북 영천시 화산면 귀호동에서 태어났다. 창녕조씨의 영천지역 입향<入鄕> 및 세거<世居>과정을 살펴 보면 조선 태조때 조신충<曺信忠>이 처음으로 지금의 금호읍 창수리에 정착하였으며, 영조때 조명직<曺命稷>이 화남면 귀호리로 이주하여 세거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조극승은 부<父> 경섭과, 모<母> 달성서씨<達成徐氏>(서덕호<徐德淳>의 여<女>)사이의 4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병조참판을 역임한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1831년(순조 31년 4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종부시주부·사헌부감찰을 역임하고, 1845년에는 성균관전적을, 1849년에는 사간원 정언으로 문신선전관을 겸직하였다. 그후 철정대에도 언관<言官>으로서 신임을 받았으나 고향에 은거하면서 유풍<儒風>을 진작시켰다. 그 공로가 인정되어 공조참의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그의 동생 성재<省齋> 규승<逵承> 또는 1867년(고종 4년) 문과에 급제하여 형제가 함께 영예를 누렸다. 두사람 모두 말년에는 지역에서 후진양성과 학문연마에 정열을 쏟아 「구애집<龜厓集>」,「성재집<省齋集>」 등을 남겼다. 1877년(고종 14년) 형 극승<克承>이 돌아가자 그를 추앙하기 위하여 「구애정<龜厓亭>」과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조씨 문중과 지역민이 두 형제의 학덕과 사상을 흠모하고 또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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