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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양신도비 -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이며, 경세가로도 이름을 떨친 분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북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산33

우리나라의 한문학은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크게 발달했으며, 그 가운데서도 시문학이 특히 중심을 이뤘다. 양곡 소세양은 조선조 1486(성종 17년)에 태어나 1562년(명종 17)에 운명한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이며, 경세가로도 이름을 떨친 분이다.

양곡이 활약했던 조선 성종대에서 면종대에 이르는 시기는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근세의 시인은 호남에서 많이 나왔다."고 하였듯이 호남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시풍의 선호가 송시(宋詩)에서부터 당시(唐詩)로 바뀌어 지는 때로 시가 문학사에 금자탑을 이룬 인물들이 수없이 배출되었는데 이 시기를 후학들은 목릉성세(穆陵盛世)라 일컫는다. 

이와 같이 시문학이 융성했던 시기에 양곡 소세양은 1730여수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이러한 양곡의 시에 대한 선인들의 평을 들어 보면 남익룡은 "평화롭고 우뚝하며 생각이 치밀하고 기교가 섬세하며 괴위와 험절로써 귀함을 삼은 이는 눌제 박상, 호음 정사룡, 양곡 소세양, 지천 황정욱 같은 거공인데 그 걸출함을 자랑하였으니 위대하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호남의 10대 시인으로 양곡 소세양과 석천 임억령, 눌제 박상, 사암 박순,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백호 임제, 고죽 최경창, 옥봉 배광훈, 금호 임형수 하서 김인후를 뽑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대개 거주지가 전남지역이나, 전북지역에서는 오직 양곡 소세양밖에 없다. 시의 양적인 면에서도 그의 시는 석천 임억령 다음으로 많은 분량이다. 

양곡 소세양이 활약한 시기는 사화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은 선비들이 많았던 때이다. 이 때 호남에서 출사한 인물가운데는 유림의 선비정신이 투철했던 이가 대부분이며, 훈구세력의 횡포를 견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리와 출세를 버리고 수시 환향하여 은둔의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양곡의 생애에서도 이런 점이 발견되어져 당시 지식인들의 고뇌를 알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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