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천시 녹전동 519
정간< 鄭幹 >은 조선< 朝鮮 >의 문신< 文臣 >으로서 자는 도중< 道中 >, 호는 명고< 鳴皐 >이다. 영조< 英祖 > 원년< 元年 >(1725) 증광문과< 增廣文科 >에 급제, 청양군수< 靑陽郡守 >, 경주부윤< 慶州府尹 >, 선천< 宣川 >·동래부사< 東萊府使 > 등을 역임, 청백리< 淸白吏 >로 녹선< 錄選 >되고 영조 33년(1757) 승지< 承旨 >에 이르렀다. 그는 탁월한 학문< 學問 >과 국론< 國論 >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 투철한 청백리로서의 처신, 효우< 孝友 >와 의리< 義理 >에 있어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으며, 왜인들마저도 송덕비< 頌德碑 >를 세울 만큼 선정< 善政 >을 베풀었다 한다. 이 영정은 오사모< 烏紗帽 >에 단령< 團領 >을 입고 호피< 虎皮 >의자에 앉은 전신좌상< 全身坐像 >으로서, 전체적인 상용형식은 숙종< 肅宗 >, 영조년간< 英祖年間 >의 양식을 보여준다. 정면관< 正面觀 >을 비롯하여 높은 사모, 공수자세< 拱手姿勢 >로 인해 밑으로 불거진 좁고 긴 소매, 족좌대< 足座臺 >의 한껏 벌린 발 사이로 보이는 호랑이의 코모습 등은 모두 18세기 초엽 정장관복< 正裝官服 >을 입은 사대부상< 士大夫像 >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밑에 깔린 돗자리는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 의하면 선천부사 재임시 선정< 善政 >을 베푼 명고의 인품< 人品 >을 숭앙< 崇仰 >하여 사민< 士民 >들이 초상화 한 폭을 그려 봉안했다 하나 이 영정과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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