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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만취당 - 사대부(士大夫) 저택(邸宅)의 구성요소(構成要素)를 두루 갖추고 있는 영천만취당

by 넥스루비 2007. 8. 7.

경북 영천시 금호읍 오계1∼2리 271

조선< 朝鮮 > 선조시< 宣祖時 >의 성리학자< 性理學者 >인 지산< 芝山 > 조호익< 曺好益 >의 칠세손< 七世孫 >으로 정조< 正祖 >5년< 年 >(1781) 전라도< 全羅道 > 병마절도사< 兵馬節度使 >를 지낸 조학신< 曺學臣 >(1732∼1800)이 젊은 시절< 時節 >에 오종동< 五宗洞 >(현< 現 > 오계< 五溪 >1동< 洞 >)에 자리를 잡아 살림집을 건축< 建築 >하고 마을 주위에 송림< 松林 >을 조성< 造成 >하였다고 한다. 전면< 前面 >의 길쪽으로 나앉은 광명헌< 光明軒 >과 후방< 後方 >에 배치< 配置 >된 별묘< 別廟 >, 보본재< 報本齋 >는 후대< 後代 >에 추건< 追建 >된 것으로 전< 傳 >해진다. 광명헌< 光明軒 >은 1909년< 年 > 소유자< 所有者 >의 증조부< 曾祖父 >가 중수< 重修 >하였고, 사랑채는 독립군< 獨立軍 >의 군자금< 軍資金 > 헌납사건< 獻納事件 >으로 일제관헌< 日帝官憲 >에 의< 依 >하여 재해< 災害 >를 당< 當 >한 것을 소유자< 所有者 >의 조부< 祖父 >가 1915년< 年 >에 중수< 重修 >하였다. 이 집은 야산< 野山 >의 송림< 松林 >이 낮게 둘러싼 평지마을의 중심부< 中心部 >에 넓게 자리잡았으며 길쪽의 새사랑채와 행랑채의 솟을대문지붕 사이로 사랑채와 안채의 지붕마루가 조금씩 보이는 평면적< 平面的 >인 경관< 景觀 >을 이루고 있다. 행랑채와 넓은 사랑마당을 격< 隔 >하여 배치< 配置 >된 사랑채는 안채와 □형< 形 >으로 튼 ㅁ자< 字 >를 이루었으며, 우측< 右側 >에 사당이 배설< 配說 >되었고 그 후방< 後方 >에 체천위< 遞遷位 >를 봉사< 奉祀 >하는 별묘< 別廟 >와 보본재< 報本齋 > 등< 等 >이 자리잡고 있어서 사대부< 士大夫 > 저택< 邸宅 >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하겠다. 이 집은 조선< 朝鮮 > 후기< 後期 > 건축< 建築 >으로 방앗간채는 철거되었으나 정침< 正寢 >을 비롯하여 새사랑채(광명헌< 光明軒 >), 별묘제사< 別廟齊舍 >(보본재< 報本齋 >), 체천위< 遞遷位 > 별묘< 別廟 >에 이르기까지 사대부< 士大夫 > 저택< 邸宅 >의 구성요소< 構成要素 >를 두루 갖추고 있어서 당시< 當時 >의 건축양식< 建築樣式 >과 주생활< 住生活 >의 형태< 形態 >를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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